“총성과 피비린내는 평생 잊지 못해”
“총성과 피비린내는 평생 잊지 못해”
  • 김기주 기자
  • 승인 2018.06.24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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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의용군으로 전쟁 참여한 박한성 옹
 6·25 전쟁에 참전한 박한성(86)옹은 6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그날의 기억은 선명했다.

 지난 1950년 7월 12일. 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도 안 돼 그가 전쟁터로 징집되던 순간이었다. 전쟁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박 옹의 나이는 고작 18세. 군산상고에서 재학 중이던 그는 ‘학도의용군’으로 전선으로 투입됐고 가족과의 짧은 이별을 뒤로 한 채 열차에 실려 갔다.

 “열차 안에는 내 또래 학생들도 참 많았어”면서 말문을 연 박 옹은 “열차 안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잠시나마 웃곤 했는데 그 수많은 친구를 영영 못 보게 될 줄 꿈에도 몰랐어”라고 말했다.

 6801720. 지금도 막힘없이 자신의 군번을 기억하던 박 옹은 지옥 같았던 전선을 회상했다.

 낮과 밤 구분없이 총성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심장 박동도 멎게 하는 포성으로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전선에서 생활은 매일 생과 사 갈림길의 연속이었다.

 “1개 중대가 150여명 정도 돼.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나니 10여명으로 줄어버린 거야. 다 죽은 거지. 여름에는 시체가 수북이 쌓여 치우지도 못했어. 피비린내는 물론이고 시체 썩은 냄새가 여기저기서 진동했지”

 전날까지만 해도 함께 했던 전우들이 전쟁의 손길에 이슬로 사라졌다. 어린 나이에 피비린내나는 사선은 그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무거웠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었다.

 전쟁을 겪으면서 떠나보낸 수많은 전우의 얼굴은 아직도 생생하다.

 박 옹은 “상사 동료 부하들을 포함해서 내 곁을 떠나갔지. 이들의 희생 덕에 지금 내가 살아있는지도 모르겠어”라며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 이마 위 주름은 더욱 깊어만 갔다.

 박 옹의 이야기는 이후로도 대대장 통신병으로 보직이 변경돼 후방으로 투입되는 과정, 작전 중 무전기 고장으로 수천명 북한군과 만났던 일 등 한참 동안 계속됐다.

 “다른 부대로 지령을 전달하던 중 포탄 파편에 오른팔 살점이 거의 다 떨어져 나갔어. 당시 병원으로 후송되면서 나를 구해줬던 위생병부터 전우들이랑 인사도 못하고 헤어져서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야. 고맙다고 말하려 다시 찾아봤지만 이미 숨진 뒤더라고”면서 당시 다쳤던 오른팔을 만지며 눈시울을 붉혔다.

 마지막으로 박한성 옹은 요즘 젊은 세대를 보며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박 옹은 “내 손자들도 6·25전쟁 이야기를 듣기 싫어하고 다른 젊은이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지금 젊은 세대들이 누리는 모든 것은 선배들과 전우들이 목숨 걸고 우리나라를 지켰기 때문에 가능한 거야”며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절대 알 수 없어.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되고 또 이 나라를 지키고자 산화한 전우들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김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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