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와 지도자
선비와 지도자
  • 김동수
  • 승인 2018.06.18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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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이 수많은 외침과 식민지 지배의 시련을 이겨내고 오늘날 세계 일류국가를 넘볼 만큼 성장한 생존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원로 사학자 한영우 교수는 50년 가까이 조선시대를 비롯한 한국사를 연구하면서 그 답을 ‘선비 정신’으로 풀어낸 바 있다. 임진왜란 때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와 고경명도 그렇고, 1910년 경술국치로 사직이 무너지게 되자 이에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 우국지사들도 대부분 유생 출신의 선비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매천 황현의 죽음은 우리에게 선비의 정신이 무엇인가를 일깨워 주고 있다. 매천은 한일합방 소식이 전해지자 “내가 꼭 죽어야 할 의리는 없으나 다만 국가가 선비 기른 지 500년이나 되었는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이르러 이를 부끄럽게 여겨 죽은 선비가 한 사람도 없다면 어찌 통탄치 않으리오.” 라는 절명시를 남기고 죽음을 택했다.

 이때 선생의 나이 56세였다. 나라를 지키지 못한 부끄러움, 그것은 개인의 명리와 구복(口腹)에서 오는 부끄러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더욱 사회적이고 공의로운 부끄러움으로 불가피하게 선택된 죽음이었던 것이다. ‘선비’가 무엇이길래 매천은 그렇게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그 길을 가려고 했던 것일까?

 선비란 학문만을 배운 지식인들이 아니라 그 배운 바를 실천에 옮기는 학행일치의 실천인들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선비의 길을 지향하였는데, 첫째가 인(仁)의 실천을 통해 자아를 완성하는 수기(修己)요, 다음이 자아를 주변으로 확대시켜 다른 사람의 인격을 완성해 가는 치인(治人),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역사회와 국가 그리고 더 나아가 인류평화를 위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가 그들의 최종 목표였었다. 남보다 먼저 솔선수범하는 삶이 되어야 했기에 선비들의 삶이란 그만큼 사회적 책무와 의무감도 컸다. 때문에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어려움 속에서도 기품를 잃지 않은 의롭고도 강직한 지조가 있어야 했다.

 지조는 선비와 지식인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지켜 가야 할 소중한 가치 덕목이지만, 특히 선비와 지도자에게 있어서의 지조는 필수 덕목이다. 식견은 누구나 노력하여 갖출 수 있다. 하지만 지조를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것을 아는 까닭에 우리는 지조 있는 지도자를 존경하고 그 곤고(困苦)를 이해하기에 그를 믿고 따르게 되는 것이다.

 요즘 우리의 현실을 보면 선비다운 지도자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고위층으로 갈수록 권력과 물질에 연연하여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민들을 혹세무민하는 정치꾼들이 횡행하고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입으로는 국리민복을 외치면서도 틈만 나면 한 때의 이름을 얻기 위해 수단 방법과 가리지 않고 이합집산과 파당을 일삼는가 하면, 각종 이권에 개입하여 사회를 혼탁하게 하고고 있다. 요즘 들어 이러한 일들이 하도 비일비재하여 비리에 연루된 당사자들이나 그들을 지켜보는 국민마저도 이젠 지치고 절망하여 정치 불신으로 자포자기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선비는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당장은 손해를 보고 기회를 놓친 것 같으나 지조와 명분을 따라야 했기에 선비는 그를 선비이게 하는 도덕적 기준과 순일(純一)한 정신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준엄한 자기 관리와 시련극복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 타인에게는 너그러우면서도 자신에게는 엄격한 지식인, 지식으로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옳은 일이라면 주위의 눈치 보지 않고 과감히 이야기하고 또 그것을 척결해 나가는 그러한 지식인이 선비 또는 선비정신이 아닌가 한다.

 어찌어찌하여 의원이 되고 단체장이 되었다 하여, 상황에 따라 처신을 달리하고, 말 바꾸기를 식은 죽 먹듯 한다면, 누가 그를 우리의 지도자라 하겠는가? ‘한 때의 적막을 받을지언정 만고에 처량한 이름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어떤 풍파와 시련에도 기개를 잃지 않는 의연한 선비가 다시 그리워지는 아침이다.

 김동수<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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