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포놀이’의 대가, 전북무형문화재 제7호 나금추 명인 별세
‘부포놀이’의 대가, 전북무형문화재 제7호 나금추 명인 별세
  • 김미진 기자
  • 승인 2018.06.11 17: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호남우도농악 부포놀음의 대가로 한 획을 그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호 상쇠 나금추 명인이 11일 새벽 별세했다. 향년 81세.

 1938년 전남 강진읍 동성리에서 태어난 나금추 명인은 1957년 광주국악원에 입문해 정광수에게 판소리 춘향가를, 한진옥에게 승무를 배웠다. 어릴 적부터 풍물을 익혔던 고인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원국악원에 입문했으며, 김영훈, 강도근을 사사했다. 이후 15년 동안 남원농악단, 춘향여성농악단, 아리랑여성농악단, 한미여성농안단 등 여성농악단의 상쇠로 꾸준한 활동을 이어갔다.

 1963년 장금동과의 혼인 후에 잠시 공백 기간이 있기도 했으나, 남편의 적극적인 지지로 출산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단체활동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 시기에 홍정택, 김동준을 사사, 판소리 공부도 지속했다.

 1971년부터는 여성농악단 활동을 접고 자라나는 미래 세대를 위한 농악교육활동에 전념해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전주농림고, 전주비사벌예술고, 군산 동중, 김제 농림고, 정읍 감곡초 등에서 농악을 지도했다.

 특히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 예인 나금추의 꽃이 핀 시기로 볼 수 있다. 전북농악경연대회 개인연기상 수상,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일반부 장원을 수상했다. 또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전북대표 이리농악단 상쇠로 80여 명의 단원을 지도하고 출전해 단체 대통령상을 받는 동시에 상쇠로 개인연기상을 수상하는 등 영광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이어 1987년에는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제7-1호 부안농악 상쇠 예능보유자로 지정됐으며, 이듬해 전북도립국악원 전임교수로 임명돼 2001년 정년퇴직까지 봉사했다. 퇴직 후에는 전주·부안·고창 등지에서 후학 양성에 전념하다 2005년 부안농악의 활성화를 위해 부안에 터를 잡았다. 2009년에는 제자들로 구성된 예술단체 ‘금추예술단’을 발족하고 서울과 전주, 부안 등에서 다채로운 공연을 선보이며 호남우도농악 상쇠춤의 멋을 알리는데 전력을 다했다.

  “굿으로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라”는 고인이 제자들에게 던진 화두다. 지난해에는 전국의 제자들과 함께 서울에서 대규모 공연을 열어 팔순의 나이가 숫자에 불과함을 몸소 보여주기도 했다. 고인은 꽹과리 가락에 한을 담아 날리고, 부포짓에 서러움을 던져버리며 판을 이끄는 넉넉한 인품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빈소는 부안군 행안면 호남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13일 오전 9시. 장지는 정읍 화신공원묘지.

 김미진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