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체의 진수 선운사의 백파율사 碑 <2>
추사체의 진수 선운사의 백파율사 碑 <2>
  • 원암 오광석
  • 승인 2018.05.29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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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파율사비 후면 탁본

 추사가 어떤 사람인가?

 제주도 유배 길에도 기세가 등등하여 전주에서는 그 당시 명필로 이름난 창암 이삼만을 불러 글씨를 쓰게 하고 해남에 가서는 초의선사에게 원교 이광사가 쓴 대흥사 현판을 떼어내고 자기글씨를 걸게 하는 등 안하무인격인 행동을 보였다.

 그 뒤 추사는 9년여 동안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고 3년 만에 또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가서 68세에야 과천 집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오랜 기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그의 모난 성격의 오만함과 방자함이 인격적으로 많은 수양을 가져왔다고 보며 노년에 불경과 참선에 몰입하면서 백파를 보는 관점도 달라졌으리라 본다.

 추사가 백파율사 비문을 쓴 시기는 타계하기 1년 전의 글씨로서 추사체의 가장 완숙기의 대표작으로 볼 수 있다.

 비의 전면에는 웅장하고 장엄한 해서체로 “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라고 쓰여 있으며 후면에는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추사체 행서로 쓰여 져 있다. 이 비는 추사체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종횡의 굵고 가는 획들의 대조가 확연하고 필획이 거친 듯 힘차고 자형 또 한 불균형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추사체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비의 글씨는 백파율사가 입적한지 3년 후인 1855년에 썼는데 백파선사가 입적한 1852년에는 추사가 북청에 유배생활을 할 때라 비문을 쓸 처지 아니었다. 그 뒤 유배에서 돌아와 과천에 기거하던 추사에게 백파 제자들이 찾아가 비문을 의뢰하였고 추사는 크게 논쟁을 벌였던 백파에 대해서 존경하는 마음으로 비문을 썼다.

 비문은 백파의 부도가 있는 순창 영구산 구암사에서 보관하다가 백파가 출가한 선운사에 추사가 세상을 떠난 2년 뒤인 1858년에 비가 세워졌다.

 따라서 비의 맨 끝에 써 있는‘완당학사 김정희 찬병서, 숭정기원후 사무오 오월 일립(阮堂學士 金正喜 撰竝書, 崇禎紀元後 四戊午 五月 日立)’이라는 글씨는 추사의 글씨가 아니다.

 유홍준 교수에 의하면 또 한군데가 있는데 금석학자 이자 한학자인 청명 임창순선생으로 부터 들었다며 “어떠한 연유에서 인지 비문의 마지막 줄에 쓰인 글씨는 추사의 글씨가 아니다. 자세히 관찰해 본 결과 다른 사람이 추사체와 비슷하게 썼으며 행간의 구사도 다르게 나타났다.”라고 표현하였다.

 실제 필자도 서예를 하고 있지만 관심을 갖고 관찰하지 않으면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유사하게 쓰여 졌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해보면 마지막 줄의 글씨는 앞의 글씨들과의 간격이나 조형성에서 다른 점을 알 수 있다.

 추사의 글씨는 빽빽한가 하면 시원하게 트이고 간격이 자유자재 롭게 활달한 맛을 가지고 있으나 마지막 줄은 자간의 간격도 답답하리만치 빽빽하기만 하고 다르다.

 현재 선운사 부도전에 있는 백파율사비는 전북유형문화재 122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는 진품의 원 비이다.

 2006년도에 탁본과 자연풍화에 비문이 마모되는 것을 막는다며 성보박물관으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 모조 비를 세웠었는데 성보박물관을 지장보궁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몇 년 후 다시 부도전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인터넷이나 많은 사람들은 진품이 아니라 2008년도에 세운 모조 비로 알고 있다. 선운사 측에서 홈페이지 같은 곳에 올려서 백파선사 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나 탐방객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았으면 한다.

 추사와 백파율사와의 관계뿐 아니라 추사와 고창과의 인연도 깊은 듯 하다.

 고창 아산면에 있는 인촌 김성수 집안 제실에 보관해 오던 추사 글씨의 주련 10여점이 2015년도에 발견되어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주었는데 본래 20여점이 있었다고 하며 다른 곳에서도 편액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다만 주련과 편액은 글씨를 목재에 새긴 것으로 복사해서 각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종이에 직접 쓴 원본이 발견된다면 그야말로 사학적으로나 추사 연구에 대한 중요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추사의 주련과 편액이 다수 발견된 것으로 볼 때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 갈 때 전주에 들려 이삼만을 만나고 고창을 거쳐 영광 나주 해남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해 본다.

 조선시대엔 중앙에서 벼슬을 하고 유배를 떠나면 지방 수령들이 찾아와 인사를 하였으며 공식적으로 객사에 재울 수는 없지만 대부분 유숙할 곳을 마련해 주었다.

 아마 추사가 고창으로 지나갔다면 어느 곳에 유숙을 하면서 글씨를 남겼으리라 추정해 보고 종이에 직접 쓴 원본이 발견되기를 기원해 본다.

 

 글= 원암 오광석(전북미술협회 서예분과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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