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어원은 그리스어 테크네, 곧 ‘기술’에서 유래하였다. 이러한 기술로서의 예술의 의미가 18세기에 이르러 예술을 ’기술‘과 구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나 오늘날의 영화, 무용, 음악 등과 같이 기분전환과 미적 가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 영역으로까지 그 범위가 넓혀지게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일찍이 시인과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떠올리게 하거나 열정을 느끼게 하는 여신을 ‘뮤즈(muse)’라 불렀는데, 근대에 와서는 뮤즈의 독창성을 창조적 충동의 원천으로 삼아 자유로운 영혼의 세계를 더욱 다양하게 신장시켜 나가고 있다. 그러다 사회가 점차 발전해감에 따라 표현양식이 다양화되면서 일상적인 것, 무딘 것들과는 대립하는 세계를 추구하면서 우리의 삶을 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심미적 세계로 이끌어 가고 있다.
예술은 표현 양식이다. 양식을 바꾸어 특수한 것을 찾고, 기존의 언어를 해체하여 낯설음 속에서 새로운 미학적 가능성을 탐색해 간다. 형식을 바꾸면 내용도 바뀌어 지고, 내용이 바뀌면 형식 또한 바꾸어지니 형식이 내용을 구속하고 형식 또한 내용을 구속한 셈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정서적 가치가 우리의 무딘 삶에 새로운 감각과 정서적 만족으로 생기(生氣)를 주게 된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아름답고 속성적으로 진실하다. 이러한 예술적 속성이 일상생활에 억눌려 있다가 그 자율적 보상 행위로서 밤에는 꿈으로 나타나 우리의 억압 된 감정을 풀어내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예술이란, 우리가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꿈이요 욕망’에 다름이 아닌 셈이다.
예술에는 작가의 무한한 상상과 표현을 추구하는 창작의 자율성과, 사회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효용론이 있다. 그런가 하면, 그것이 주는 정신적 즐거움과, 인생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교시적(敎示的) 기능도 있다. 때문에 어느 한 쪽에 치우친 견해를 갖다 보면 문화적 색맹주의에 빠지게 되니 이 양자를 잘 조화시켜 나가야 한다. 예술을 사회적 효용성 측면에서만 본다면 창의성과 자율성의 위축으로 세상에 대한 다양한 판단과 가치를 상실하게 될 것이고, 예술이 즐거움과 자율성만을 추구하다 보면 사회적 가치와 현실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손과 두뇌로 만드는 것은 기술이며, 손과 머리와 심장으로 만드는 것이 예술이라고 한다’(조지훈). 하지만 그 심장(예술)은 세상을 직접 개선하지는 않지만, 우리를 좀 더 나은 세계로 이끌어 가게 하는 힘이 있다. 분열되고 파편화된 현대사회에서 양심과 본능, 이성과 감성의 억압 속에서도 또 다른 생명의 활로를 끊임없이 열어가고 있기에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예술과 인문학이 함께 만나면 더 넓은 세계가 열리게 된다. 각 분야 예술의 장르를 인문학적 키워드로 특강과 해설을 곁들여 풀어내면 즐겁고 아름다운 그러면서도 나를 깨워 거듭나게 하는 생의 축제가 되리라 본다.
때론 음악으로, 영화로, 그리고 문학과 여행으로 우리의 삶은 윤기를 더하게 된다. 눈이 즐겁고 귀가 즐거우니 머리도 즐겁고 가슴도 즐겁다. 인문학과 예술의 만남은 메마른 삶에 감성을 덥혀 저 무의식의 내면에 억눌려 있던 진정한 자아를 만나 그들과 함께 생(生)의 희열을 느끼게 되리라.
김동수<시인/미당문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