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체의 진수 선운사의 백파율사 碑 <1>
추사체의 진수 선운사의 백파율사 碑 <1>
  • 오광석
  • 승인 2018.05.22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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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율사비 전면 탁본
 필자는 선운사와 경수산을 사이에 둔 수다동이 고향이며 인근에 있는 삼인 초등학교를 다닌 연고로 어려서부터 선운사에 수 없이 가 보았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인근 선운사에 우리나라 최고의 명필 추사 김정희가 쓴 백파율사 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다가 서예를 시작한 30여년 전에야 인지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반 관광객들에게는 백파율사 비가 있던 부도전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 답사기’에 백파율사비가 추사 김정희의 글씨라고 소개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추사는 북학파의 일인자인 박제가의 제자가 되어 청나라 고증학에 관심을 가졌고 24세 때엔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가서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같은 대 학자들과 교류를 하면서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법에 대한 전반적인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다.

 추사는 국내에 돌아와서 금석학과 서법에 관심을 갖고 연구에 몰두 하였으며 그 결과 북한산 순수비(北漢山 巡狩碑) 등 많은 금석문을 발견하고 판독하는 등 금석학파를 성립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서법은 옹방강의 서체를 따랐으며 더 나아가 왕희지, 구양순, 안진경, 등의 여러 서체를 섭렵하였고 더 나아가 한(漢), 위(魏) 시대의 예서체를 쓰면서 예서체에 서도의 근본이 있음을 알았다.

 이들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밑바탕으로 하여 제주도의 유배기간에 각고의 노력 끝에 독창적인 추사체를 완성시켰으며 문인화로는 국보 180호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와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라고도 불리는 부작난도(不作蘭圖) 등을 남겼다.

 이러한 불세출의 명필 추사가 어떤 연유로 백파의 비문을 썼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나름대로 자료를 찾아보았다.

 추사 김정희(1786-1856)와 백파(白坡/1767-1852)의 관계는 해남 대흥사의 초의(草衣/1786-1866)와 더불어 깊은 관계가 있다.

 백파는 선(禪), 교(敎), 율(律)을 겸비한 덕망이 높은 스님으로 선문수경(禪文手鏡)을 지어 불교계에 큰 논쟁을 일으키게 한다.

 백파의 선(禪)사상은 선종(禪宗)의 8대조인 마조(馬祖)에서 제창되어 11대조 임제(臨濟)에 이르러 크게 일어난 조사선(祖師禪) 우위사상에 입각한 정통성 확립이었다. 임제선사가 확실한 개념규정 없이 제시한 임제삼구(臨濟三句)에 모든 교(敎), 선(禪)의 요지가 포함되었다고 보면서 이 임제삼구의 내용에 따라 선(禪)은 의리선(義理禪), 여래선(如來禪), 조사선(祖師禪)으로 구분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백파의 선문수경에 맞서 반박논리를 편 것은 해남 대흥사의 초의였다.

 초의는 백파의 선문수경에 대해 조사선이 여래선 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며 선은 조사선과 여래선, 격외선과 의리선으로 구분된다는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를 펴내어 반박을 하였다.

 이런 논쟁의 와중에 초의의 절친한 벗이자 불교에 박식함이 있는 추사 김정희가 끼어들어 백파와 불꽃 튀는 논쟁을 벌인 것이다.

 추사와 백파의 여러 번에 걸친 왕복서한 논쟁은 그 당시 유명하였으며 특히 당시 58세인 추사가 77세인 백파에게 논지가 잘못되었다며 15가지로 반박한 백파망증 15조(白坡妄證十五條)에서 오만방자한 말투로 백파와 그의 문도들을 힐난하였던 것이다.

 추사의 글 중에서 한 구절을 소개하면“~스님의 소설이 이와 같은 것을 보니 선문(禪門)의 모든 사람들은 거개가 다 무식한 무리들뿐이라 더 이상 이렇고 저렇고 따질 거리가 못되니 내가 이들을 상대로 그렇고 저렇고 따지는 것이 철부지 어린애와 떡 다툼하는 것 같아서도리어 창피 하도다 이것이 스님의 망증(妄證) 제 1이요”이러한 형태로 15가지를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이에 백파는 “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우려고 덤비는 꼴”이라고 가볍게 넘겼다. 백파는 선의 체계와 분류를 철저한 전통주의적 틀에서 이해하였고 추사는 실학의 새로운 학문적 논리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백파와 추사의 논쟁은 그 뒤에도 계속 되었으며 대를 이어 백파의 제자 설두와 초의의 제자 축원으로 이어지면서 논쟁이 계속 되었다.

 백파율사는 선문수경 이후에도 많은 저서를 남기고 1852년 세수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추사와 백파의 관계는 이렇게 치열한 논쟁을 벌인 관계였으나 어찌된 일인지 추사가 70세(1855년)에 쓴 백파율사 비문을 보면 공손함과 스님에 대한 존경이 극에 다다른 내용으로 완전히 다른 감정을 보여준다.

 비 문 끝 부분의 내용을 소개하면“가난하기는 송곳 꽂을 땅도 없었으나 기개는 수미산을 누를 만 하였네 부모 섬기기를 부처 섬기듯 하매 가풍이 가장 진실하도다. 그 이름 긍선이니 전전한다 말할 수 없다네”라고 쓰여있다.

 

 글= 원암 오광석(전북미술협회 서예분과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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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숙 2018-05-23 11:15:53
건전한 비평을 통해 의견을 나누는 것은 다양한 의견을 받아들이고 다름을 인정함에 있어서 좋은 것 같습니다. 상대방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았던 추사 김정희선생님이셨군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