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과 탄생의 미학
소멸과 탄생의 미학
  • 이소애
  • 승인 2018.05.21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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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투로 추락한 문학인들이 사회적 공분에서 소생하려면 어떻게 변신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본다. 문인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작품은 자신의 자화상이다.

 존재감의 두려움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오래된 숲에서 싱싱한 초록의 재생 의미를 찾아보는 것도 좋을 성싶다.

 느릿느릿 시나브로 숲을 거닐면서 살아있는 나무 옆에서 죽은 나무를 관찰해 본다. 나무는 죽어야 제 몸속의 나이테를 보여 준다. 몸통에 톱질을 한 주검에서 그동안 살아온 생의 연륜을 보여준다. 잘려나간 밑동에서 비, 바람, 햇빛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시인이다.

 사람이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듯 나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지 않은가. 아마도 상처를 저항할 힘이 없으면 나무는 옆으로 옆으로 기울어져 죽음 쪽으로 눕게 된다. 동물들이 수피를 뚫고 할퀸 자국에서 도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는 나무를 본받고 싶다.

 쓰러진 나무는 잃은 생명을 불사르지 않고 수많은 생물들에 몸을 내어주는 미학에서 잠시 생각에 잠겨 본다. 딱따구리가 구멍을 뚫어 제집 마련에 혼신을 다할 것이고, 다람쥐가 겨울 먹이인 도토리를 감추어 둘 곳을 찾을 것이다. 수액이 흘러나오면 곤충들에게 목을 축여 주는 생명수가 되리라.

 까치집을 짓게 하느라고 은행나무는 실바람에도 잔가지를 땅으로 떨어뜨린다. 그 잔가지로 새벽부터 집을 짓는 까치에게 한 줌의 햇살을 보태주고 싶었다.

 동백숲을 지나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숲길에서 이끼 낀 고목과 뿌리를 밟으면서 스산한 마음을 달래보았다. 봄비에 동백꽃들이 채 피어나지 못한 채 질퍽한 숲길에 널브러져 있었다. 꽃의 울부짖음이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않은가. 꽃자리에서 뚝 떨어지는 순간의 소리를 들어보았느냐고.

 오래된 나무들의 수피와 밑동 그리고 땅을 딛고 드러낸 뿌리들의 자태에 흠뻑 정신이 나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밑동을 하늘에 들이대고 벌떡 누워버린 죽은 나무에서 인간의 죽음을 묵상해 보았다. 가난한 이들을 보살폈던 고 이태석 신부(1062~2010)를 떠올려 보았다.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에서 봉사하다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신부와 쓰러진 숲 속의 죽은 나무와 공통점을 찾아보았다.

 또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고 여러 권의 수필집을 출간한 유명한 장영희 교수(1952~2009)가 남긴 문학에세이 <<문학의 숲을 거닐다>>의 책장을 넘기면서 글 쓰는 사람의 사명감이 어떠한 것인지를 반성하기도 했다.

 이들에게서 소멸했으나 사후의 새로운 탄생을 메아리처럼 번지게 하는 힘이 번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제목이 없는 에밀리 디킨슨(미국, 1830~1886)의 시는 글을 쓸 때마다 경종을 울려준다.

 내가 만약 누군가의 마음의 상처를

 막을 수 있다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내가 만약 생명의 고통을 덜어 주고

 기진맥진해서 떨어지는 울새 한 마리를

 다시 둥지에 올려놓을 수 있다면

 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단 한 편의 시를 쓸지라도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작품을 쓰기 위해 문인들은 얼마나 사물을 통찰했는지 반성해본다.

 숲 속 쓰러진 나무처럼 죽었으나 죽지 아니하고 새로운 생명체를 위하여 몸을 내어주는 그런 작품을 쓰도록 노력하는 일이 새로운 탄생의 미학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소애<시인/전주문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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