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포크스(Guy Fawkes)와 한진, 그리고 우리 사회
가이포크스(Guy Fawkes)와 한진, 그리고 우리 사회
  • 송일섭
  • 승인 2018.05.17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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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그룹 총수 일가 퇴진’을 촉구하는 시위가 장기화될 전망이다. 지난 12일의 2차 집회에서는 한진의 계열사 지원들이 대거 참여하였고, 일반시민들까지 합세한 서울역 광장에서는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벼락 갑질’로 드러난 조 씨 일가를 처벌해 달라고 하였다. 2016년에 있었던 촛불혁명을 방불케 한다. 갈수록 시위 참가자가 늘어날 전망이며, 당국의 수사 방향도 갑질에 그치지 않고, 오너 일가(一家)의 불법, 밀수, 부당 내부거래 등 전 방위로 확대되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된다.

그런데 이번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가이 포크스’라는 흰 가면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시위 모습과는 달랐다. 그 가면의 유래는 대략 이러하다. 가이 포크스 (Guy Fawkes, 1570.4.30. - 1606.1.31.)는 영국에서 화약 음모사건(Gunpowder Plot)을 계획한 로마 가톨릭 혁명 단체의 한 사람이다. 그가 부패한 로마 카톨릭을 보고 종교개혁에 앞장섰던 영국의 국왕 제임스 1세를 폭약으로 암살하려 했다. 물론 이 사건은 미수에 그쳤지만, ‘녀석’이라 뜻하는 영어 단어가 그의 이름 ‘Guy’에서 유래되었다니 예사롭지 않은 사건이다.

가이 포크스(Guy Fawkes)’의 행위에는 비릿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종교개혁’은 그 시대의 화두가 될 만큼 절박한 시대과제였고, 아울러 근대 시민의식의 성장을 보여준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이 포크스의 행위는 ‘반역’이나 ‘배반’으로 읽히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그런데 ‘가이 포크스’의 가면은 어느 때부터 ‘저항’과 ‘거부’로 읽혀지고 있다. 역사란 때로는 이렇게 원의(原意)와는 달리 해석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한진그룹 직원들이 이 마스크를 쓴 행위는 ‘저항’과 ‘고발’의 의미다. 절대적으로 힘이 약한 사람들이 이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와서 상처받은 속마음을 털어놓으면서 연대하고 있는 것이다. ‘물벼락 갑질’로 드러난 대한항공 오너가(家)의 ‘반인권적 행위’는 시민들의 공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들만의 왕궁 속에서 살아온 특별한(?) 삶이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시민들의 분노는 나날이 증폭되고 있다. 큰딸의 ‘땅콩 회항’사건이 아직도 생생한데 작은딸이 이번에 벌인 ‘갑질’은 온 국민들에게 더 큰 충격과 분노를 안겨 주었다. 여전히 그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직원들을 닦달하고 있으며, 무엇이든 자기들 뜻대로 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만만한 것은 아니다. 옛날의 방식대로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특히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발달, 페이스 북 등 SNS가 실시간으로 작동되면서 베일에 가려졌던 권력자들과 가진 자들의 삶이 무제한으로 노출되고 있다. 아득한 옛날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비사가 오늘날에도 그대로 알려지고 있는 것을 보라. 옛날에도 이러했거늘 오늘날이야 오죽하겠는가.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당사자들만의 음모와 거래를 고민했다. 그래서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상관하지 않고 손아귀에 든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멋대로 내지르는 폭언, 패악이 담긴 영상이 유통될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올해 초부터 확산된 미투(mee too) 운동은 또 어떤가. 소문만 무성할 뿐 막강한 권력의 비호 아래 자행되었던 패악이 밝혀지면서 내노라하는 인사들이 텁썩 주저앉는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는 지금 ‘탈권위의 시대’라는 커다란 파도를 맞고 있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아성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린 것을 똑똑히 보았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이 불변의 진리임을 확인하지 않았는가. 이제야 어렸을 때 어른들이 하시던 말씀이 제대로 들린다. 매 순간을 잘 살아야 한다는 것, 남을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세상에는 자신만의 성(城)이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그런 세상은 없다. 세상은 원래부터 활짝 열린 공간이다. ‘물벼락 맞는 사람들’이 있는 한 세상은 여전히 슬프다.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와 내가 공존하지 않으면 세상은 한없이 위태롭다. 사람을 존중하지 않은 세상은 언제나 위기다.

 송일섭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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