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에 책상 덮개를 열고 ‘둘’에 책을 꺼낸다”
“‘하나’에 책상 덮개를 열고 ‘둘’에 책을 꺼낸다”
  • 정은균
  • 승인 2018.05.17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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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균의 학교뎐 6]
나는 국가주의 교육 시스템이 개인에게 국가에 복종하고 국가를 섬겨 따르게 하는 일을 지상 과제처럼 여기는 체제라고 본다. 국가주의 교육 시스템 아래서 국가는 학교와 학생을 국가의 복속물로 만들기 위해 다방면에 걸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노력한다. 우리나라 근대 학교의 기원이 된 메이지 시대 일본 교육 시스템이 그 구체적인 실상을 보여준다.

근대 일본의 메이지 정권이 1872년 학제를 공포한 뒤 실질 취학률을 90퍼센트 이상 달성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30년이었다. 그 사이 메이지 정권은 학교가 전 국민을 일체화하는 절대적인 공간이 되게 하기 위해 갖가지 학교 의식을 도입하고, 국가 정세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활동에 힘을 썼다. 그들은 학교를 보통 사람이 국가에 충성하는 국민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경주로(curriculum)’처럼 만들었다. 한 세대만에 이루어진 100퍼센트 가까운 취학률이 이와 같은 노력의 결과였다.

나는 메이지 정부가 1890년 10월 30일 반포한 교육칙어(敎育勅語)가 학교가 학생을 국민으로 만들어내는 경주로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한다. 교육칙어는 반포 이듬해인 1891년 일본 내 모든 학교로 내려간 뒤 근대 일본 국민을 만드는 제1의 캐치프레이즈가 되었다. 그뿐 아니라 국가에 충성하고 천황에게 효도하라는 교육칙어의 정신이 1911년 <조선교육령>을 통해 본격화한 조선 식민지 교육 시스템에 그대로 틈입하여 조선인을 황국신민화 하는 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칙어는 임금이 직접 밝힌 말이나 그것을 적은 포고문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본 제국 신민들의 수신과 도덕 교육의 기본 규범으로 삼기 위해 만들어진 교육칙어는 국가를 하나의 가족처럼 전제하고, 천황을 가족 국가의 정점이자 권력 시스템의 중심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교육칙어에서는 국민의 충성심과 효도심이 “국체의 정화”이자 “교육의 근원”이라고 규정한다. 국민이 교육을 통해 천황(국가)을 부모처럼 여기면서 충성하고 효도하고 복종하는 신민(臣民)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메이지 정권 문부성은 교육칙어에 담긴 이와 같은 국가주의적인 교육철학을 ‘덕교(德敎)’라는 이름으로 지칭하면서, “교과서의 권두에 실어서 신민의 자제로 하여금 일과를 시작할 때 소리 내어 읽게 하여 저절로 그 성스러운 뜻을 머릿속에 새겨 덕교를 체득하게” 하였다. 그 구체적인 방법을, 문부대신 요시카와 아키마사의 훈시 형태로 각급 학교에 내려보냈다. 학교에 의식이 있는 날이나 특별히 정한 날에 학생들을 집합시켜 교육칙어를 받들어 읽고, 뜻을 반복하여 가르쳐 학생들이 익히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반포 이듬해인 1891년 6월 17일에는 소학교 축일과 대제일(大祭日) 등의 의식에 관한 규정이 정해졌다. 이에 따라 지침을 통해 각종 의식을 거행할 때마다 어진영(御眞影; 천황을 그린 그림)을 향해 경례하고 교육칙어를 봉독하는 일을 의무화했다. 교육칙어는 국정교과서 체제가 시작된 1904년 4학년(당시 의무교육 최고학년) 수신 교과서 말미에 실린 뒤, 6년제 의무교육으로 바뀐 1908년부터 4학년 이상의 수신 교과서 첫머리에 실렸다.

교육칙어의 정신이 진가를 발휘하기 가장 좋은 때가 전쟁 시기였다. 1894년 8월 1일 일본 천황이 청일 전쟁 개시를 알리는 조서를 공포하였다. 여름방학 중이어서 학교에 학생들이 아무도 없었으나 여러 학교에서 학생들을 등교시켜 조서 봉독식을 했다고 한다. 전쟁 개시 뒤 소학교 학생들은 전승 기원을 위한 신사 참배와 축하회 참가, 군자금 헌납운동 등에 동원되었다. 학교가 예비 군인을 양성하는 기관처럼 작동하고, 학생이 전쟁을 뒷받침하는 보급병처럼 움직였다.

전쟁이 본격화하자 학교교육의 색깔이 더 크게 바뀌었다. 학생들의 활발한 신체 활동과 체육 수업을 중요시하는 풍토가 번져나갔다. 1894년 9월 12일 일본 문부성은 <체육 및 위생에 관한 훈령>을 내리면서 제4조에 “큰소리를 지르거나, 빨리 달리거나, 웃고 장난치는 태도를 불량스럽게 여기고, 차분하고 조용한 태도를 품행이 좋다고 하여 가산점을 주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라고 했다. 제5조에서는“학생들을 필기와 암송에 힘쓰게 하는 것이 과도하게 정신적 피로감을 가져온다면, 특별히 필요한 때 이외에는 그렇게 하지 말 것을 요한다”라고 했다. 전쟁 전 “교내에서는 잡담, 큰소리, 마구 뛰어다니는 것을 금한다”라고 했던 문부성이 전쟁이 시작되자 크게 소리를 내고 뛰어다니는 신체 활동을 은연중에 조장한 것이다.

문부성의 ‘특별한’ 지침이 내려오자 학생들은 즉각적으로 반응하였다. 학생들 사이에 전쟁놀이가 성행하였고, 학생들이 교내에서 모의 공방전을 벌였다.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승리하자 일본 사회 전체에 소학교 교육이 널리 보급되고 발달한 덕분에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되었다는 여론이 일기도 하였다.

일본 근대 학교의 군대식 학교 문화는 일찍이 메이지 교육 초창기부터 시작되었다. 1874년 9월 일본에서 간행된 <상하소학교수업법 세기>에서는 일본의 근대식 학교제도가 도입된 직후 교실에서 이루어진 일제식 수업 풍경을 이렇게 묘사한다. 교사는 학생들을 차례로 앉힌 뒤 학생들이 지참물을 책상에 넣기를 기다려서 리쓰레이(立禮; 기립하여 경계를 하는 것)를 해야 한다. 책을 꺼내는 것은 절도 있는 구령에 따라 이루어졌다. ‘하나’에 책상 덮개를 열고, ‘둘’에 책을 꺼내고, ‘셋’에 닫았다.

학교의 풍경과 의식과 문화는 잠재적 교육과정이 되어 학생들의 심성에 그대로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군인 제식과 같은 절도 있는 동작이 펼쳐지는 학교와 교실에서 학생들의 심성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청일 전쟁 시기 일본 학생들의 놀이를 보기 삼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근대 학교 시스템은 그와 같은 메이지 시기 일본 학제의 ‘복붙’이었다. 수업 시작 전 외친 ‘리쓰레이’ 구령에 맞춰 일제히 인사를 하는 군국주의 교육철학이 우리나라 근대 학교 형성에 그대로 이어졌다. 리쓰레이는 1945년 해방과 함께 없어졌지만 그 흔적까지 완벽하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정은균 군산 영광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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