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백당 김계행 선생에게 청렴을 묻다
보백당 김계행 선생에게 청렴을 묻다
  • 최철원
  • 승인 2018.05.10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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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렴, 몸과 마음이 깨끗하다 라고 표현된다. 요즘 들어 우리 사회에서 임용되는 공직자의 임용 척도에 대해 모든 분야에서 점검을 받고 인성과 도덕성에 흠집이 있나 없나를 보고 있다.

 채용비리로 공직에서 낙마한 분, 조사를 받고 있고 이미 교도소에서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바라는 청렴상은 누가 있는가, 자주 오르내리는 최영장군의 사위인 고불 맹사성선생, 아곡 박수량선생, 다산 정약용 선생 등 우리가 헤아릴 수없이 많다.

 여기에 한분을 소개하여 청렴상의 모범으로 삼고자 한다.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을 물질 만능주의라고 부른다. 지금 이 ‘천자(賤資)’가 천하를 휩쓸고 있지만, 아직 휩쓸지 못한 곳 뼈대는 없고 오직 돈만 가진 졸부가 행세할 수 없는 곳 바로 안동이다. 그 뼈대를 추적하다 보면 수 백년간 면면히 이어져온 이름난 양반 집안들과 만나게 됩니다.

 청렴과 강직으로 존경받았던 안동지역의 보백당 김계행(寶白堂 金係行·1431~1517)선생의 집안도 그런 집안 중 하나입니다.

 안동 지역에 선비문화를 정착시킨 주역은 역시 16세기 중반에 활동한 퇴계 이황선생으로 외래 사조인 불교를 이 땅에 토착화시킨 인물이 원효대사라고 한다면 중국의 주자성리학을 조선 실정에 맞게 토착화시킨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동에서 퇴계가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보백당 김계행 선생 같은 한 세대 앞선 선배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한 일화를 통해 김계행 선생의 청렴정신을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같습니다.

 보백당 김계행 선생은 벼슬이 늦어 초시에 합격하고 32세가 되던 1462년에 성주향교의 교수로 발령 받은 지방교육담당관 정도 되는 말직으로 근무시절 당시 집안의 장조카로서 불문에 출가한 학조대사(學祖大師)가 성주에 들렀다고 합니다. 조선 초기에 공식적으로는 억불정책이 시행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왕실의 내부, 왕비나 상궁을 비롯한 여자들은 여전히 불교를 믿고 있었으므로 학덕이 있는 승려들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시기로 학조대사는 당시 금강산 유점사를 중창(重創)했으며, 후일 성종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와 연산군의 비였던 신비(愼妃)의 후원을 받아 해인사의 대장경 판각을 중창한 궁중 실력자였다고 합니다. 안동 출신인 학조대사가 성주에 들렀을 때 성주목사에게 “내가 숙부를 좀 뵈러 가야겠다”고 말하자, 목사는“왕실의 존경을 받는 대사께서 거기까지 직접 가실 필요가 있겠느냐. 이리로 오라고 하면 된다”고 하였다. 목사가 사람을 시켜 보백당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관아로 오라고 하자, 보백당은 “공무도 아닌데, 사적인 일로 관아에까지 갈 일이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소식을 들은 학조대사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 부랴부랴 성주향교로 숙부를 만나러 갔다. 학조대사는 미관말직에서 고생하고 있는 숙부를 도와줄 요량으로 좋은 벼슬자리로 옮길 의향이 없는가 하고 타진하려고 했던 것이다. 왕실에 줄을 대어서 숙부를 중앙 관직으로 옮길 수 있도록 힘쓰겠다는 이야기였다. 보백당은 “너한테 부탁해서 내가 어떻게 벼슬을 하겠느냐! 그렇게 되면 내 체면은 무엇이 되느냐, 우리 집안의 정신이 그것 뿐이란 말이냐. 너, 공부를 다시 해야겠다”고 일갈했다고 한다. 보백당은 학조대사를 호되게 꾸짖고 회초리 세례를 안겨 종아리에 피가 날 정도였다고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김계행 선생은 49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50대 이후부터 본격적인 벼슬을 시작으로 성균관 대사성, 대사간, 이조참의 등을 역임했으나 부조리한 정치현실을 비판하는 상소를 끊임없이 올렸기 때문에 사임과 취임을 반복했다고 합니다. 마침내 무오사화를 겪으면서 현실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와 말년에 짓고 산 집의 당호가 보백당입니다. 그는 87세에 운명하면서 자손들을 전부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최후의 유언을 남겼는데 “오가무보물(吾家無寶物)이오, 보물유청백(寶物惟淸白)이라.” “우리 집에 보물은 없다. 보물이 있다면 오로지 청백 뿐이다”는 뜻입니다. 그의 유언은 조선 선비가 생명처럼 지키려고 했던 정신의 뼈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보백당에 지금도‘보물유청백’이란 현판이 걸려있다고 하니 청백리 정신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공직 임용하고 싶은 분, 임용되어 계신 분이라면 기회가 되면 한번쯤 들러보고 살아가는데 청렴의 기를 받았으면 합니다.

 최철원<국립임실호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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