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프레임, 그만 던져 버려라
왜곡된 프레임, 그만 던져 버려라
  • 송일섭
  • 승인 2018.05.03 15: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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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7일은 우리 8천만 한민족에게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하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4월 전쟁설’이 떠돌면서 국민들이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려야 했는데, 바로 그 4월에 한반도 전역에 불어닥친 훈풍, 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이렇게 되기까지 헌신적인 노력을 하신 모든 분들게 감사를 드린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관련자들의 결단과 헌신에 감사드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북한은 핵폭탄을 쏘아대고, 크고 작은 행사에는 핵폭탄을 대형 트럭을 몰고나와 우리 국민들을 경악하게 하였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국장위원장은 서로 핵단추를 가지고 있다면서 설전을 이어갔고,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의 가슴은 얼마나 섬뜩했는지 모른다. 그런 당사자들의 언제 그랬냐 싶게 마음을 바꾸고 상생의 방법을 논의하는 모습은 의외로 따뜻하고 경이로웠다.

그런데도 몇 사람의 정치지도자들의 인식은 조금도 바뀌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있었던 긴장과 대립, 그리고 무력행위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자세일 것이다. 뼈아픈 과거를 잊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지난날의 잘못에 묶여서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지금까지 저들이 그랬으니까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단정하고 과거의 사슬에 묶여 있는 것은 정치지도자가 견지해야 할 자세는 아니다. 모처럼의 화해 무드를 남한정부를 통째로 북에 넘긴다는 생각은 참으로 속 좁은 언술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한반도 운전자론’을 언급하면서 한국이 남북관계를 주도적으로 풀어가겠다는 의지에 대하여 ‘코리아 패싱’이라고 시비를 걸기에 바빴다. 그러다가 남북관계가 국민의 여망 속에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은 어쩌면 속상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남이 잘 되면 배가 아프고, 못 되면 두들겨대는 심사가 비친다. 그런 생각으로 ‘판문점 선언’을 바라보는 심사는 마땅치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판문점 선언’에 국민들의 기대가 높아질수록 국민들이 철없어 보일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그들에게 ‘판문점 선언’은 그들에게는 ‘주사파의 밀약’ 또는 ‘위장된 평화 선언’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선 당장 극심한 긴장과 갈등을 넘어선 것만으로도 의미가 큰데, 그들은 그들만의 어깃장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일시에 모든 것을 만족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서로 대치하면서 살아온 세월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한 순간에 어느 한쪽을 패자로 만드는 외교는 절대로 성공한 외교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한지도 모르겠다. 하기야 지금까지 애써 대화국면을 만들어 놓으면 그들은 어림없는 일이라는 듯 대화의 문을 닫기에 바빴다. 그 세월이 벌써 이명박과 박근혜의 9년이었고, 그때 북쪽에서는 죽기 살기로 핵을 만지작거리며 새로운 기회를 엿본 것 아닐까.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시작된 남북대화는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목표는 쌍방 간의 긴장 완화요, 장기적으로는 통일의 초석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권은 종북논리로 덧씌우면서 색깔을 입히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판문점 선언’은 진일보한 새로운 이정표로 만들어야 한다. 과거의 흠집을 건드리면서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다. 현재 상존하는 엄청난 간극을 극복하면서 공통의 관심사부터 해결하는 것이 순리고 도리다. 그런데도 어깃장을 늘어놓기에 바쁜 모습을 보면서 사람의 생각이 그렇게 고집스럽고 맹목적일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이 무겁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한 주변국 지도자들이 모두 환영하는 것을 보면서도 영 마음이 내키지 않은 사람들의 셈법이 참 궁금하다.

한 때는 트럼프를 추종하며 걸핏하면 그에게 달려가 하소연이라도 할 듯 적극적이던 사람들이 미국 대통령의 반응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없다. 상대방의 흠을 잡는데 바쁘고 국민의 여망을 무시하는데 정신이 없다. 세간의 말로 어느 나라 국민인지 모르겠다는 말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물론 그런 사람들의 걱정이 다 쓸모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몇 번의 정상회담을 거치면서 우리가 속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밖으로는 평화를 말하면서 안에서는 핵폭탄을 만들어낸 것은 사실이다. 이처럼 잘못된 가능성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처음부터 밀약에 의한 위장 평화쇼라고 단정할 뿐, 변화의 가능성을 애써 차단하는 듯 이색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일단 회담 결과에 담은 국민 여망을 공감하면서 아쉬운 부분에 대해서는 더 통제하고 조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장삼이사의 상식으로 볼 때 너무나 매몰차기에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지금까지 서로 외면하며 서로 경쟁해 왔는데, 앞으로도 계속 적대시하고 경쟁하자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대북 경제제제 등 대북 압박은 한반도의 당사자뿐만 아니라 주변국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한다. 북한을 계속 고립된 상태로 핵무기나 만들게 해서는 결코 어느 나라에도 유익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해 주는 것이다. 개인의 관계가 그렇듯이 조직과 조직,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만큼 진전한 것만으로도 우리는 크게 환영할 일이다. 군사분계선을 서로 넘으면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를 상상해 보라. 같은 민족이 서로 지척에서 으르렁거리면 살아온 세월에 대한 감회 또한 컸으리라 생각한다.

이 땅의 지도자들이여, 따뜻한 가슴으로 세상을 보는 넉넉함을 보여 주기 바란다. 동시에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나 간과한 것이 있다면 통절한 가슴으로 헤집고 보완하게 하라. 그러나 반대를 위한 반대, 색깔론이나 안보장사로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국민의 90%가 그 역사적 의미를 환영하고 있는데, 여전히 왜곡된 프레임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꼴을 보며 안타깝기에 하는 소리다.

송일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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