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 방정환과 어린이날’
‘소파 방정환과 어린이날’
  • 이상우
  • 승인 2018.05.02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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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파 방정환은 1899년 11월 9일 서울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는 방경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 때 가족으로는 증조부모, 조부모, 큰고모, 작은고모, 그리고 지병으로 고생하시던 어머니와 말동무로 2살 위의 누나와 삼촌, 2살 아래인 사촌 동생이 있었다.

 1907년 증조부의 사업 실패로 전 재산을 채권자에게 빼앗기니 어려운 고초가 시작되었다. 1914년 육당 최남선이 발행하는 <청춘>의 창간호에서 ‘어린이의 꿈’이라는 글을 통해 최초로 ‘어린이’가 나온다.

 19세의 나이로 천도교 3대 교조 의암 손병희 선생의 3녀 용화 여사와 결혼을 하고, 처가에서 기거하며 소년 운동에 전념하게 된다. 1919년 3·1운동으로 일본 경찰에 피검되어 고문을 받다가 1주일 만에 석방되었다.

 소파는 일본 경찰의 등쌀로 동경 유학의 길에 오르게 된다. 일본 동양대학 철학과에서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연수한다.

 천도교청년회 동경지부의 회장직을 맡고서는 서울을 왕래하며 소년 운동에 전력을 다 한다.

 1920년 8월 25일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 불을 켜는 아이’를 <개벽 3호>에 발표함으로써 어린이의 단어를 널리 알리게 되었고,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여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서로 사랑하여 도와줍시다.”란 표어 아래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쓰기로 하는 등 본격적인 소년 운동에 돌입한다.

 소파 방정환은 ‘어린이날’을 1923년 5월 1일 일본 도쿄에서 ‘색동회’를 창설하면서 처음 만들었다.(1946년부터 5월 5일)

 단체 이름인 ‘색동회’는 동요 작가 윤극영이 색동저고리를 생각하며 제안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어린이’라는 말은 늙은이, 젊은이와 동등한 존재라는 뜻을 담았다고 했다.

 당시 어린이는 어른의 소유물로 여겨졌으며 인격을 가진 존재로 대접받지 못했다.

 그는 전국 순회 강연을 통해 어린이에 대한 부모의 각성을 촉구했다. 그리고 한국 최초로 아동잡지 <월간 어린이>를 창간했다. 거기에는 동요 ‘고향의 봄’, 동화 ‘호랑이 곶감’, 동시 ‘까치까치 설날’을 선보이며 근대 아동문학의 요람이 되었다. 고한승, 마해송, 이원수와 같은 1세대 아동문학가들이 이 잡지를 통해 작품을 발표하고 독자들과 소통을 했다. 소파 방정환은 동화 ‘아기별 삼형제’ 동요 ‘귀뚜라미’ 등 아동문학의 창작과 외국 동화 번역에도 힘썼다.

 1931년 7월 23일 06:54분 서울대학 병실에서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 하오.”라는 유언을 친구에게 남기고 가셨다. 그는 ‘어린이 찬미’에서 “어린이는 순 복덩어리다. 마른 잔디에 새 풀이 나고, 나뭇가지에 새 움이 돋는다고 제일 먼저 기뻐 날뛰는 이도 어린이다. 봄이 왔다고 종달새와 함께 노래하는 이도 어린이이고, 꽃이 피었다고 나비와 함께 춤을 추는 이도 어린이다. 별을 보고 좋아하고, 달을 보고 노래하는 것도 어린이요, 눈이 온다고 기뻐 날뛰는 이도 어린이다. 산을 좋아하고, 바다를 사랑하고, 큰 자연의 모든 것을 골고루 좋아하고, 진정으로 친애하는 이가 어린이요, 태양과 함께 춤추며 사는 이가 어린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기쁨이요, 모든 것이 사랑이요, 또 모든 것이 친한 동무이다. 자비와 평등과 박애와 환희와 행복과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만 한 없이 많이 가지고 사는 이가 어린이다. 어린이의 살림 그것 그대로가 하늘의 뜻이다.”라며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 위에 어린이를 올려놓고 찬미하였다.

 우리는 제96회 ‘어린이날’을 맞아 소파 방정환 선생의 유언을 깊이 되새겨야 한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이 마음껏 뛰어놀며 공부할 수 있도록 어른들이 세상을 보호해야 하는데, 학교폭력, 가정폭력, 성폭력, 유괴에 인질까지 난무하는 시대로 변모해 가기 때문이다.

이상우 / 한국아동문학회 전북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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