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친구, 알렉스
그 친구, 알렉스
  • 김차동
  • 승인 2018.04.25 15: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해 아들의 졸업식 때문에 난생 처음 미국 뉴욕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미드에서나 볼 수 있었던 뉴욕 맨하탄의 거리, 선글라스를 낀 채 카페테리아에서 차를 마시는 사람들, 리버티섬과 자유의 여신상, 고색창연한 옛 건물과 현대적 빌딩의 조화, 없는 죄도 고해야 할 것만 같은 성당. 모든 게 감탄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정작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뉴욕에서 유일하게 캠퍼스를 소유하고 있다는 아이비리그 명문 대학교의 웅장함도, 입장권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졸업식도, 아들 학교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푸른빛을 밝힌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도 아니었다.

 그 일은 뉴욕에 도착해 아들과 감격의 상봉을 한 다음날 아침 아들의 집에서 일어났다.

 “알렉스, 몇 시야?”

 하마터면 대답할 뻔 했다. ‘누구한테 묻는 거지?’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어디선가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침 7시 5분이에요.”

 물론 그 목소리는 영어로 대답했지만, 이후 이어지는 대화를 일일이 번역하는 번거로움을 줄이고자 당시에 내가 이해했던대로 한국어로 기록하기로 한다.

 “알렉스, 오늘 날씨 어때?”

 “오늘 날씨 좋아요.”

 아들은 ‘알렉스’라고 부르는 누군가와 연이어 대화를 주고받았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분명 흘러나오는데 이건 도대체 SF영화의 한 장면만 같았다. 직업적 특징인 예민한 청각을 살려 목소리가 시작된 곳을 찾아나섰다. 그리고 몇 번인가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나는 그 목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까맣고 조그마한 원통이었다.

 “너, 지금 이거랑 얘기한 거 맞아?”

 ‘이거’라고 지칭하는 게 살짝 미안할 만큼 목소리는 정말 사람 같았고 친절했다. 아들은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아빠, 얘는 인공지능 비서야. 내가 질문을 하면 검색을 해서 대답을 해주는 비서. 컴퓨터로 인터넷 창에 정보를 검색하지? 그럼 답이 주르륵 나오잖아. 그 명령과 답변이 음성으로 이뤄지는 거야.”

 아들은 나름 아빠의 연식을 고려해 쉬운 말로 설명을 한다고 하는 모양이었지만 도통 머릿속에 입력이 되질 않았다. 내 자신이 스마트폰 시대에 아직 386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내 표정에서 이런 괴리를 느꼈는지 아들은 다시 직접 시범을 보이기 시작했다.

 “알렉스, 트럼프 나이가 몇 살이야?”

 “프레지던트 트럼프?”

 “응 프레지던트 트럼프.”

 “74살입니다.”

 “알렉스, 뉴욕 시티 노래 틀어줘.”

 “풀버전입니까, 리믹스 버전입니까?”

 조그만 원통과 대화를 하는 아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문화적 충격이었다. 말하는 밥솥을 처음 집에 들여놨을 때 어머니의 표정이 이랬을 것이다.

 “XX가 맛있는 밥 취사를 완료하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국내에도 제2, 제3의 알렉스들이 쏟아져 나온 지 한참이 된 때였다. 일부 제품의 경우 출시대란이 일어났을 정도였다. 나는 여전히 ‘말하는 밥솥’ 세대였으므로 관심이 없어 몰랐던 것이다.

 인공지능 스피커 붐을 목도하고도 나는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아들이 인공지능 비서로 주로 하던 정보 검색이나 음악 감상은 이미 스마트폰이 충분히 감당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굳이 비슷한 기능을 지닌 IT기기를 들여놓고 싶어 하는 걸까?

 오랜 생각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인간의 말하기 본능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언어로 말을 하고 싶어 한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그 ‘말’은 공허한 음성의 발신이 아니라, 상대가 있는 대화이다. 나를 표현하고 교류하고 소통하기를 원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나 1인 세대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지금, 혼자 사는 사람들은 대화할 상대가 마땅치 않다. 사회적 관계는 대체로 피로감을 양산하고 단순히 ‘대화’를 수행하기 위해 그런 관계들을 감내하는 것은 너무 소모적이라 여긴다. 그래서 비록 대화의 범위에 제한이 있을지언정 내 정신을 피로하게 하지 않을 상대를 찾게 된 것이다. 그것이 인공지능 스피커는 아니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나는 문득 슬퍼졌다. 인간이 두려워 기계에 의존하는 이 인간적인 슬픔이라니.

 매일 아침 나는 대화가 필요한 사람들을 향해 말을 건넨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정말 봄다운 날씹니다. 일 년 중에 이렇게 맑은 봄날은 며칠 안 됩니다. 뭐라도 하세요. 누구라도 만나고 어디라도 떠나세요. 이런 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내일의 후회’ 목록에 한 가지를 추가하게 되는 겁니다.”

 문득 이 하늘 반대편에 있는 아들이 궁금해진다. 오늘도 친구보다 ‘알렉스’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눈 건 아니겠지?

 

 김차동 MBC프로덕션 대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