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당하는 정신’을 가르치라
‘지배당하는 정신’을 가르치라
  • 정은균
  • 승인 2018.04.19 15: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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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균의 학교뎐 4]
근대 학교의 비밀스러운 로드맵은 단순했다. 국가와 민족의 흥왕을 위해 멸사봉공하는 인재를 양성하자. 국민 일반에게 보통교육을 실시하여 체제에 순응하고 국가에 충성을 바치는 신민을 길러내자. 이 로드맵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리고 이는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지 않았다. 유사 이래 정치 권력이 있고, 권력을 끝없이 유지하려는 욕망을 가진 집단이 존재하는 한 국가주의 교육은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통치 카르텔의 주요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정치 체제와 권력이 주목하고 강조하는 교육철학을 크게 두 가지로 간추리려고 한다. 첫째, 지배하는 정신이 타인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한다. 둘째, 지배당하는 정신이 스스로를 통제하면서 타인에게 지배당할 수 있을 정도까지 가르친다. 국가는 이를 위해 학교 구조를 특권화?위계화에 바탕을 둔 시스템에 따라 편성하고, 계급이나 계층을 고려하여 학생들을 차등적으로 선별하였다. 차별화한 교과목과 교과과정 같은 수단들이 학생들을 선별하고 분류하는 데 동원되었다.

미국 공립학교 교사이자 명망 있는 진보 교육운동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존 테일러 개토는 현대식 학교의무교육의 출발지인 독일에서 92퍼센트의 어린이를 교육하는 국민학교(Volksschule)의 교육 목표가 지성 발달이 아니라 ‘복종과 순종의 사회화’였다고 주장했다. 주체적인 개인으로서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는 일은 8퍼센트의 선택된 학생들이 들어가는 6년제 학교 레알슐레(Realschule)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여기서는 중급기술자나 공무원을 양성했다고 한다. 개토는 독일 철학자 요한 하인리히 고트프리트 피히테(1762~1814)가 현대식 의무교육에서 길러내야 한다고 주창한 인간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

 2) 고분고분한 광산 노동자

 3) 정부 지침에 순종하는 공무원

 4) 기업이 요구하는 대로 일하는 사무원

 5) 중요한 문제에 대해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개토가 주장한 복종과 순종의 사회화가 학교교육의 철학과 가치를 근거 없이 지나치게 폄훼한다고 단정하지 말자. 나는 근대 교육사의 역사적인 흐름을 넓게 바라보면 복종과 순종의 사회화가 국민교육이나 보통교육이나 의무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진 근대 학교 교육의 기저를 차지하는 기본 정신이었다고 주장한다. 학교는 그러한 국가주의 교육을 위한 최적의 공간이 되었다. 나는 우리가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중립적인 태도로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학교와 학교교육 시스템에 대한 비판은 이러한 태도를 기본 전제로 한 바탕 위에서 설득력 있게 이루어질 수 있다.

국가가 주도하고 통제하는 근대 교육 시스템 아래서 국민은 일방적이고 획일적인 관리 대상이자 부국강병을 실현하기 위해 동원되는 도구처럼 간주될 가능성이 크다. 윌리엄 보이드는 근대적인 초등교육의 최초 실험자로 알려진 영국의 로버트 오언(1771~1848)이 영국 전역에 걸쳐서 초종교적인 획일적 교육체제가 정부 주도 아래 설립되어야 한다고 했다면서, 오언의 견해가 “가장 잘 통치되는 국가는 최선의 국가교육체제를 갖추고 있는 국가”라는 명제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오웬의 ‘혁명적인 교육 방안’이, 출생에서 20살에 이르는 아동을 대상으로 한 “신체적으로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새로운 인종의 남녀를 기르는” 내용으로 제시되어 있다고 하면서, 이를 위해 국가가 주도하는 교육 시스템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나는 국가나 민족이 근대 학교(교육)와 관련된 담론의 전면에 나타나게 된 시발점을 앞서 말한 피히테에게서 찾으려고 한다. 1807년 피히테는 프랑스군 점령 아래 있던 베를린 아카데미 강당에서 <독일 국민에게 고함(Addresses to th German People)>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행했다. 그 해 12월 13일부터 이듬해 4월 20일까지 매주 일요일마다 총 14회에 걸쳐 이루어진 피히테의 연설은 크게 두 가지 논점을 전제하고 있었다. 첫째, 국가가 의무교육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둘째, 이를 통해 국민(학생)이 국가(정부)의 명령에 복종하는 법을 배우게 한다.

국가가 주도하는 의무교육 시스템을 통해 피히테가 전달하려고 했던 메시지는 국민 정신을 개조하여 무너진 독일을 다시 세우자는 것이었다. 피히테는 독일 국민 모두가 ‘전체를 위한 자주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교육을 통해 투철한 국가관과 희생정신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교육 혁신을 통한 일종의 ‘정신 혁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교육사가들은 피히테의 연설이 근대 학교 제도를 정립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19세기 초 독일에서 시작된 현대식 의무교육 시스템은 국가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와 강제적인 학교교육을 기반으로 작동되는, (통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효율적인 제도였다. 교육은 민족적 ? 국가적 차원에서 사람들의 생각을 하나로 묶어주는 구실을 해야 했는데, 학교가 이러한 책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민족과 국가의 융성이라는 과업을 달성하게 하는 최적의 장소가 됐다.

정은균 군산 영광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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