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지 않게 하는, 당당하게 거부하게 하는
가만히 있지 않게 하는, 당당하게 거부하게 하는
  • 송일섭
  • 승인 2018.04.12 14: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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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가쁘게 기다리다 끝끝내 접히고 만,/ 저 여리디 여린 꽃잎들에게 / 무슨 말을 드려야 할까./ 태초로 돌아가는 데도 말이 필요하다면 / 그중에 가장 선한 말을 골라 / 공손하게 바쳐 올리고 싶다. /그러나 아무리 궁리해도 나는 / 사랑한다 미안하다 / 미안하다 사랑한다 / 이보다 선한 말 찾을 수 없다. / 어떤 말이 더 필요하랴. / 이 통절함 담을 말 어찌 있으랴.

-중략-

동트기 전 대지에다 속삭인다./ 얼마나 하찮은지 뻔히 알면서도 / 웅얼웅얼 여기저기 심는다.

불귀의 영혼들아, 사랑한다 / 내 속삭임 듣고 싹 틔워라, 빌면서 / 거듭거듭 단단하게 심는다. /이제는 기다리지 말아라./ 가만히 있지도 말아라. / 너는 완전 자유다, 아이들아. /그러니 가만히 따르지 말고 / 다시 태어나라, 아이들아./ 다시 돌아와 온전히 네 나라를 살아라. /너희가 꿈꾸던 그 나라를 살아라. / 사랑한다, 아이들아./ 내 새깽이들아.

출처 :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2014), 정우영 ‘가만히 있지 말아라’ (p.154-155)

 

정우영 시인은 2014년 세월호 참사에 대하여 ‘사랑한다, 미안하다’라는 말 외는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어찌 시인만의 생각이겠는가. 당시 이 나라의 제대로 된 어른들이라면 그 누구라도 죄책감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세상 어디에 이런 나라가 있을까. 우리 모두는 절망하면서도 분노했다. 왜냐하면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벌써 4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는 그날의 참담함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 사건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여전히 그 원인이 규명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사고 수습과정에서 드러난 의혹도 풀리지 않았다. 2014년 4월 16일, 나는 그날 정호승 시인을 초청하여 ‘삶에 힘이 되어주는 시’에 대한 주제로 아이들에게 특강을 듣도록 했다. 우리들이 시인의 특강에 몰입하고 있는 그 순간에 진도 앞 바다 벵골수도에서는 세월호가 서서히 침몰하고 있었던 것이다. 학창 시절의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야 할 수학여행이 생의 최후가 되는 그 암담한 상황,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고 가슴이 미어진다. 한때 단원고 학생 303명을 비롯한 승객 전원이 구조되었다는 그 긴급 뉴스에 의아해하면서도 다행스런 일이라며 가슴 쓸어내렸던 일도 떠오른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오보(誤報)로 드러나면서 우리들은 또 한 번 깊은 슬픔과 분노에 휩싸여야 했다.

그때 왜 우리는 그렇게 분노하고 절망했는가. 그날 시인이 그렇게 역설했던 ‘인간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세월호 사건에서는 ‘관심 밖의 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낡은 배를 사들여 무리하게 구조 변경을 한 것도 문제였지만, 배가 기울어지고 물이 들어오는데도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고 외쳐대고,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이 구조에 앞장서지 않고 민간인 복장으로 탈출하는 모습을 보면서 경악해야 했다. 세월호 주변에 구조 인력과 장비들이 속속 도착했음에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쳐다보고만 있었다니 분통 터질 일이 아닌가. 게다가 정부는 또 어떠했는가. 대형 사고가 발생하여 수많은 목숨들이 위태로운데도 엉뚱한 셈법으로 우왕좌왕했던 정부도 우리는 잊지 못한다. 어찌 그것뿐인가. 대통령의 ‘잃어버린 7시간’도 아직 풀리지 않았다.

어찌 보면 세월호 참사는 예비된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수명이 다한 배를 무리하게 구조를 변경하는 과정에서 감독기관은 자본과 결탁하면서 시민의 안전과 생명을 외면하였다. 언론과 정부는 단순한 해상교통사고로 축소하고자 안간힘을 썼고, 초기의 부실 대응에 대하여 감추기에 바빴다. 사후의 시신 수습 및 선체 인양도 어깃장을 놓고 미루다가 지난해 3월 23일에 이루어졌다.

세월호 침몰 사건이 남긴 교훈은 여러 가지가 있다. 특히 교육적 관점에서 우리가 얻은 교훈은 매우 크고 엄중하다. 지금까지 우리 교육은 아이들을 개성과 다양성을 갖춘 ‘야생마’로 키우는 데 주저하고, 체제에 잘 순응하는 ‘경주마’로 기르는 데 급급했다. 체제에 순응하지 않으면 낙오자가 된다고 경고하면서 순응하는 교육을 강요하기에 바빴다. 불을 보듯 뻔한 잘못을 보고서도 그것을 지적하고 거부하는 것을 쉽게 용인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세월호 사건에서 보여주듯 그 위기의 순간에도 시킨 대로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아이들이 되었던 것이다.

순응하게 하는 교육은 이제 죽은 교육이다. 이것은 박근혜 국정농단 사태에서도 여실히 잘 보여준 사실이다. 머리 좋은 것 하나 믿고 누구보다 먼저 출세한 사람들이 부정과 불의 앞에서 침묵하고 순응하다가 인생의 종말을 가져온 것을 우리는 똑똑히 보았다. 이거야 말로 순응적 엘리트 군상들의 서글픈 초상이 아닐까. 그들이 만약 맹목적 순응을 거부하고 정의와 진실 앞에 당당했더라면 그들이 개인적 불행은 물론이고 그가 속한 조직도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세월호의 교훈은 더 이상 ‘가만히 있게 하는 교육’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제 아이들이 자신의 주장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허용해야 한다. 가만히 있지 않게 하는 교육, 더 나아가 잘못에 대하여 당당하게 ‘거부하게 하는 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가오는 4월 16일에 ‘기억하라, 분노하라’는 테마를 세월호 4주기 기억식을 준비하고 있다. 정우영 시인이 노래하듯 아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칠 것이다. “이제는 기다리지 말아라. 가만히 있지도 말아라. 너는 완전 자유다.” 라고.

송일섭(시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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