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장군의 혼이 담긴 서예작품<2>
안중근 장군의 혼이 담긴 서예작품<2>
  • 원암 오광석
  • 승인 2018.04.10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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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예(書藝)는 한자(漢字)와 더불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쓰는 사람의 마음을 표출해 내는 심화(心畵)로서 옛날부터 인격수양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삼았다.

 안중근 장군은 구속되어 있는 영어(囹圄)의 몸으로 좌절하지 않고 강한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마음을 평정시키고 글씨를 썼기 때문에 훌륭한 작품들이 나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의거에서 순국까지의 여순 감옥 생활 중 사형이 언도된 1910년 2월14일부터 3월26일 순국 때까지 최후 40 여 일간 휘호(揮毫)한 것들이며 지금까지 확인된 유묵(遺墨)들은 60-70여점에 이른다.

 작품을 받은 사람들은 장군을 취조한 일본인 검찰관을 비롯하여 공판정을 오고 갈 때 경호해 준 헌병, 감시했던 경관, 간수 등 모두 일본인들이다. 국내에 있는 대부분의 작품들은 국가에서 보물569호(현재569-1~569-26호)로 지정하였으며 대표적인 작품들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견리사의 견리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1910년 3월에 휘호한 작품으로 “이익을 보거든 정의에 맞는가를 생각하고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라는 뜻의 종서로 된 작품이며 논어 헌문편(論語 憲問篇)에 나오는 글귀이다.

  장군이 살아온 철학과 너무나도 딱 들어맞는 문장이다. 이 작품은 전형적인 행서로서 운필에 속도감이 느껴지며 날카로움이 느껴지는데 이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다는 신념이 베어 있는 것 같다.

  이 작품은 측서로 “경술 3월 어여순 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書)라고 쓰고 장군의 상징인 손바닥 장인(掌印)을 찍었다. 이 작품은 1972년8월16일에 보물569-6호로 지정되었다.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 1910년 3월26일 순국(殉國)직전에 휘호한 작품으로 장군이 공판정을 오고 갈 때 경호를 맡았던 일본 헌병 지바도시치 간수에게 써 준 작품으로 1980년 8월23일에 그의 가족으로부터 기증을 받아 안중근의사 숭모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라는 뜻의 종서로 된 작품이다. 대부분의 측서에 “안중근서”(安重根書)라고 되어 있는데 이 작품은 “안중근 근배”(安重根謹拜)라고 써서 높은 예의를 표하였다.

  특히 이 작품은 安重根 將軍이 대한의군 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은 군인으로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 헌신(獻身)하였음을 일본군에게 고지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글귀는 대한민국의 육, 해, 공군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정신교육의 지표로 삼는 명구이다. 이 작품은 2000년 2월15일에 보물569-23호로 지정되었다.

  ‘지사인인 살신성인’(志士仁人 殺身成仁) 1910년 3월 휘호한 작품으로 “지사(志士)와 어진사람은(志士仁人) 몸을 죽여서 인(仁)을 이룩한다” 라는 뜻이다.

  이 작품은 해서(楷書)에 가까운 행서(行書)작품으로 한자 한자를 정성들여 썼다. 특히 단순한 획수의 글자인 사람인(人)의 파임을 두텁고 묵직하게 운필하여 밑의 획수가 많은 죽일 살(殺)과의 조형(造形)을 생각하였다.

  장군이 여순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 할 때까지 40일간 죽음을 앞에 둔 고뇌를 예술로 승화시킨 절절한 육필(肉筆)의 결과물이 장군의 서예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생각해 보건데 장군은 31세의 짧은 생을 살았는데도 작품을 보면 장군의 인문적인 지식을 가늠할 수 있고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실천했던 국가관, 사생관, 독립의지들이 한데 어우러져 독창적인 작품들이 나왔다고 본다.

 

 끝으로 사형집행 전 두 동생에게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에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라고 유언을 남겼는데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장군의 유해(遺骸)는 아직까지 정확한 위치를 모른 체 장군이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으며 후손으로서 장군에게 부끄러울 따름이다.

 

 글= 원암 오광석(전북미술협회 서예분과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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