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문화 왜곡 재연에 누가 우는가? <1>
조선왕조문화 왜곡 재연에 누가 우는가? <1>
  • 최정철
  • 승인 2018.04.09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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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 직후 기록 사진. 사진 오른쪽에 고종과 순종이 보이고 사진 왼쪽의 어린 소년이 훗날의 영친왕이다. 소년 뒤로 모시 달린 관모를 쓰고 있는 자들이 바로 환관이다
 조선왕조는 대한제국 시기를 포함 518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그 중심에는 풍패지향(豊沛之鄕) 전주가 있고. 수많은 시련을 헤치고 우리 민족을 오늘에 이르게 한 조선왕조가 일제의 강압으로 허망하게 무너진 지 백여 년이 지난 지금도 조선왕조에 대한 우리의 애정은 여전히 크다. 조선왕조 역사가 각종 궁중의례 재연행사, 드라마, 영화에 차고 넘치도록 활용되고 있음이 그것을 대변한다. 그러나 심각한 고증 오류로 조선왕조문화가 일부 왜곡되어 있음을 볼 때 조선왕조의 탯줄인 전주로서는 영 못마땅할 것이다. 대표적 오류들을 살펴보자.

 먼저, 흔히 보는 오류 사례들이다.

 첫째, 환관 관모가 잘못되었다. 거장 신상옥 감독이 월탄 박종화 원작소설 <금삼((錦衫)의 피>를 영화 <연산군(1962년)>으로 제작할 당시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했다. 배우들 뒤에서 앵글을 잡아 촬영할 때 문무백관과 환관을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당시 B모 촬영감독이 환관 역 배우들을 불러 세워놓고는 그들 관모에서 모시(帽翅, 깃)를 죄 뽑았다. 이에 신감독은 쾌재를 올렸으니 이미지 상 모시 빠진(‘뭣’이 빠진 자들인지라) 관모가 아주 그럴 듯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드라마든 영화든 환관들은 모시 없는 관모를 주구장창 써오고 있다. 환관도 전문직 관료였기에 모시 달린 관모를 쓰지 않을 리 없었으니 이제라도 실제를 회복시켜주어야 한다.

 둘째, 궁중의례에서 왕이 앉는 자리가 이상하다. 정전 안 어좌에 앉아야 할 왕으로 하여금 정전 밖 상월대에 임시 설차(設次)한 어좌에 앉도록 하고 있다. 이 오류의 시원(始原)은 조선왕조문화 복원 첫 번째 사업으로 치러진 왕세자 관례 재연 행사가 1995년 경복궁에서 치러질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왕세자 관례는 동궁에서 치러야 한다. 그러나 당시 주최 측인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서 근정전으로 장소를 바꿀 것과 왕도 출연시키기를 고집했다. 여기에 더 큰 오류가 뒤따랐으니 정전 밖에다 왕을 앉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화재 관리 상 정전 내부를 쓸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왕을 주인공으로 삼아 관객들에게 드러내 보이자는 의도였다. 그때부터 모든 드라마나 영화에서 왕은 저격수의 독화살이 날아들 정전 밖에 나앉아야 했다.

 셋째, 의례 시 왕 동선이 잘못 운영되고 있다. 의궤(儀軌)에는, 왕은 정전 뒤 집무실에서 여(輿)를 타고 나타나 정전 동편 계단에 도착, 여에서 내려 계단을 걸어올라 정전으로 입장하고 의례가 완료되면 서편 문을 통해 정전을 퇴장, 서편 계단을 걸어 내려가 여를 타고 다시 정전 뒤 집무실 혹은 침전으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 즉 정전 앞 쪽으로는 일체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왕은 여를 탄 채 정전을 반으로 가르고 있는 어도(御道) 끝에서 출발, 정전 앞까지 나아간다. 여가 도착하면 왕은 여에서 내려 정전 중앙 계단을 걸어올라 상월대 어좌에 앉는다. 어도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공간일 뿐이지 왕이 걸어 다니는 런웨이가 아님에도 이러는 것이다.

 다음은 예산 부족에 의한 주요 오류 사항들이다.

 첫째, 의례 시 문무백관들이 정전 맨 바닥 방석 위에 앉아 소반 음식을 먹는 모습. 외국인들에게 보여주기에 낯 뜨거운 장면이다. 원래는 상월대를 덮는 보계(補階) 무대가 그 높이를 유지한 채 정전 뜰 중간 지점까지 나오도록 설차 되고 문무백관들의 찬안(饌案) 자리는 정전 방향으로 무대 위 동서남 위치에 마련된다. 무대 중앙에서는 정재(呈才)가 공연되고. 그런데도 한 나라의 고위 관료들을 맨바닥 돗자리 방석에 앉혀 놓고 소반 음식을 차려주곤 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이제 엉성하나마 낮은 단을 만들어 그 위에 앉히곤 하나 재연 행사에서는 아직도 이점을 왕왕 간과하는데 관람 편의상 하월대 높이로 낮게 조절하더라도 보계 무대는 반드시 설차하고 문무백관들을 올려 앉혀야 한다.

 둘째, 무대를 덮고 정전 처마까지 치솟는 대형 차일도 포기하고 있다. 정전 뜰 품계석 주변을 돌아보면 여기 저기 박혀있는 아이 팔뚝 굵기의 큰 쇠고리들이 있다. 대나무들을 두텁게 이어 꼬아 만든 지지대로 넓은 차일을 사방에서 일으켜 세우면 차일 끝을 잡아 맨 줄을 당겨 이 쇠고리들에 각각 매어 묶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차일의 규모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형 차일 재연은 지금껏 시행된 적이 없다.

 

 글 = 최정철 서울한양도성문화제 총감독(『성공을 Design하는 축제실전전략』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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