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학교의 탄생 (2)
근대 학교의 탄생 (2)
  • 정은균
  • 승인 2018.03.22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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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나라 근대 학교의 출발기였던 개화기(1876~1910)가 교육의 가능성과, 그것을 실현하는 일의 어려움을 입체적으로 보여준 시기였다고 이해하고 싶다. 당시 우리 관과 민은 모두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기말 전환기의 시대 조류에 맞서기 위해 교육 사업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무엇보다 당시 조선 정부가 교육을 통한 전면적인 국가 개혁에 큰 기대를 걸었음을 알 수 있다. 1894년의 갑오개혁 이후 고종이 교육 조서(1895년)를 통해 교육 입국을 향한 의지를 밝히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학교 교육 시스템을 마련하기 위해 각종 학교 관련 법규를 제정하고 학교를 설립하는 등의 노력을 취한 것이 구체적인 증거들이다.

민족 선각자들과 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하기 시작한 민간학교들은 이와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교육의 가능성과 희망을 보여주었다. 최초의 근대식 국립학교인 육영공원이 세워진 1896년에 우리 교육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반 교육을 설립 목적으로 하는 현대식 학교인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의 출현이 그것이었다.

미국 감리교 선교본부에서 한국 선교사업의 임무를 부여받은 스크랜튼 부인(Mrs. Mary F. Scranton)이 조선에 도착한 것은 1885년 6월이었다. 그는 도착 즉시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한국 여성을 위한 교육기관 설립을 구상하였다. 그리고 1년여 뒤인 1886년 5월, 정부 관리의 첩이었던 여성 한 명을 데리고 학교 수업을 시작하였다. 수업이 이루어진 장소는 스크랜튼 부인의 아들인 의사 윌리엄 스크랜튼(William Scranton)의 사택이었다.

‘김 부인’이라고 불린 첩 출신 학생은 스크랜튼 부인에게 3개월 동안 수업을 받은 뒤 떠났다. 자신의 첩을 스크랜튼 부인에게 맡긴 관리는 첩이 영어를 배워 왕후의 통역이 되게 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첩 출신 학생이 떠나고 3개월만에 가난한 집안 출신의 여자 아이가 스크랜튼 부인에게 왔다. 처음에 아이 어머니와 이웃 사람들은 스크랜튼 부인을 의심하였다고 한다. 그가 아이를 잘 길러 미국으로 데려가 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스크랜튼 부인이 “나는 당신의 딸 복순(福順)이를 맡아 기르며 공부시키되 당신의 허락이 없이는 서방(西方)은 물론 조선 안에서라도 단 십리라도 데리고 나가지 않기를 서약함”이라는 내용이 담긴 문서로 확약 보증을 한 뒤에야 걱정과 의심을 풀었다.

곧이어 이 조그만 학교에 대한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 쭈글쭈글한 서양 노부인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조선의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스크랜튼 부인에게 맡기기 시작하였다. 그 사이 의사 사택 한 모퉁이에서 이루어진 수업은 새로 이사한 건물에서 이루어졌다. 학교 설립 이듬해인 1896년에는 민비가, 천대받는 조선 여성을 가르치는 스크랜튼 부인의 뜻을 가상히 여겨 직접 학교 이름을 지어 보냈다. 오늘날 우리에게 최초의 근대식 여성 교육 기관으로 알려져 있는,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이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이화학당과 더불어 19세기 말엽 근대 학교 태동기를 대표한 학교는 배재학당이었다. 배재학당은 미국 감리교 선교본부가 스크랜튼 부인과 함께 임명한 조선 선교사의 한 사람이었던 아펜젤러(H. G. Appenzeller)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영어를 가르치는 사숙(私塾)의 형태로 출발한 배재학당에는 영어를 배우고 싶지만 관리들의 추천을 받지 못한 학생들이 주로 모여들었다. 당시 유일한 영어 교육 기관이었던 육영공원은 당상관 추천을 받은 고관대작의 자제들만 학생으로 받고 있었다.

아펜젤러의 기록에 따르면 배재학당의 공식적인 출범이 1886년 6월로 되어 있다. 이듬해인 1887년이 되자 아펜젤러는 조선 정부에게 ‘배재학당’이라는 교명과 사액 현판을 하사받는다. 이후 배재학당은 미국 감리교 재단의 재정 지원에 힘입어 강당과 강의실과 도서실 등을 갖춘 서양식 건물을 갖추게 되면서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선다.

출범 4년 뒤 제정된 배재학당의 학칙을 보면 학교 운영이 세부적인 기준에 따라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수업료와 학비, 등교 시간과 타종 기준, 학생 행동 지침과 수업과 도강(정기적인 시험) 등 전반적인 학사 관련 항목들에 걸쳐 근대적 교육방식의 특징이 드러나는 내용들로 조항들이 채워져 있다. 그런데 비교적 일정한 학생 수에 비해 학생들의 출석률이 저조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실제 교육 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배재학당은 1895년부터 6년 동안 조선 정부와 맺은 관비 영어어학 위탁 연수 계약을 발판으로 꾸준한 성장가도를 달린다.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의 초기 역사와 관련된 자료들을 범박하게 살펴보면 학교가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근대 학교의 운영 방식에 따라 굴러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교육학자인 오천석도 <한국신교육사>에서 이화학당과 배재학당 같은 개화기 선교계 학교가 활용한 여러 가지 제도들, 예를 들어 두 학기로 나뉜 학년제, 일정한 시간 구분에 따른 하루 일과 운영, 입학과 퇴학 절차에 관한 명시적인 규정, 현금 수업료 제도, 성적표 작성과 발송 들이 모두 근대식 교육 방식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개화기 미국 기독교계의 지원 아래 세워진 선교계 학교들은 구래의 조선 교육이 표방한 교육철학이나 교육 목적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다. 가령 비록 초등교육 수준에 불과했지만 여성 교육에 힘쓴 이화학당의 경우는 그 이전 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남녀평등교육의 구체적인 실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기존 교육 시스템 아래서 소외된 가난한 서민 출신 학생들에게 교육 기회를 마련해 준 이들 사례를 교육 평등주의와 보편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시도였다고 해석해도 될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 대목에서 글의 기조를 바꾸어 모종의 ‘교육 음모론’을 제시하려고 한다. 교육의 가능성과 어려움, 교육에 대한 희망과 좌절 사이에서 좌충우돌하고 우여곡절을 겪으며 탄생한 근대 학교들의 이면에 무언가 은밀한 비밀이 숨어 있는 것처럼 보여서다. 나는 그 비밀을 “근대 학교는 국가주의의 배양장이다”라는 거친 명제 안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계속)

정은균 군산 영광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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