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위해 아픔 딛고 거듭 나야
내일을 위해 아픔 딛고 거듭 나야
  • 송일섭
  • 승인 2018.03.15 14: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람의 말에는 세 가지 장르로 구분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구분한 것으로 과거에 있었던 일을 말하는 사법적 장르, 현재의 가치를 논하는 제의적 장르, 그리고 미래의 정책을 말하는 정치적 장르이다.(조선일보, 2018-01-02,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 미래를 말하지 않은 정부)

‘나라다운 나라, 정의로운 나라’를 표방하면서 과거의 적폐청산에 앞장서고 있음을 지적하며 문재인 정부가 사법적 장르에 빠져 있다는 말일 게다. 정치권의 잘못에 대한 문제 제기는 어느 시대나 늘 양비론에 휘말렸다. 따라서 적폐청산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못마땅한 것이 되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제야 뭔가 되어가는 느낌을 갖게 한다.

적폐청산은 과거의 잘못을 단죄하는 대표적인 사법적 장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과거의 잘못을 따지는 것이 단순히 과거를 언급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기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밝은 내일, 정의로운 미래로 가는 길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왜 우리는 잊고 싶었던 일을 해마다 되새기는가. 민족의 비극이었던 6.25 전쟁을 해마다 기억하면서 그 속에 담긴 공과를 끄집어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의 아픔만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5.18민중항쟁을 되새기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다시는 이 땅에 불법으로 정권을 찬탈하고 민중을 억압하는 불행한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다짐 아니고 무엇인가.

과거 청산은 밝은 미래를 여는 지름길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근대사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과거청산을 한 적이 없다.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이 되었지만, 우리는 새로운 리더십을 창출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때 민족을 짓밟았던 친일파들의 지배가 이어지는 모순을 그대로 겪어야 했다. 이런 왜곡된 구조는 우리에게 엄청난 희생을 고스란히 대물림하게 했다. 그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과거의 부귀와 영화를 이으면서 살아남는 것이다. 불법과 국정농단이 면전에서 일어나고 있음에도 말한 마디 못한 관료의 안이함을 우리는 똑똑히 보았다. 어쩌면 이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자화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최근 영화 『1987년』을 보면 우리 젊은이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시간에 전두환 군사정권은 이들을 억압하면서 친구까리 정권을 나눠 가졌고, 거기에 아첨한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우리의 지도자임을 자처하고 있다. 왜 이런 일들이 가능했을까. 청산되지 않은 적폐가 그때그때 기회주의자들의 발 빠른 행보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청산되지 않은 적폐는 반드시 미래에 쌓일 적폐가 된다는 측면에서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적폐들이 그때그때 청산되었더라면 어떻게 수많은 관료들이 그런 부정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저지를 수 있었을까.

우선 당장은 불편하고 아플 수도 있다. 한쪽에서는 ‘정치보복’이라고 날선 공방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잘못은 청산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전직 대통령의 검찰 출두와 관련한 정치 집단의 논평에는 아직도 극과 극이다.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마치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낯설기만 할지도 모른다. 최근 미투(Me too)와 관련해서도 어제의 영웅들이 부패와 불법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다. 여기에는 사법적 장르만 불편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지, 제의적 장르와 정치적 장르가 모두 망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옳고 바른 일이면 계속 밀고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밝은 내일을 맞이할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는 집단적 이해만 난무할 뿐, 미래를 견인할 만한 철학과 비전을 세우는 데는 인색한 것 같다. 최근 물꼬를 튼 남북대화에서도 국민들은 집단의 맹목적 광기를 보았다. 어느 신문에서 이를 ‘즐거운 혼돈, 가슴 설레는 불확실성’이라며 했다. 그런 만큼 함께 지혜를 모으고 대안을 논의해야 할 때다. 마치 일말의 기대조차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른 이야기 아닌가. 어디에도 거시적 안목은 없고 눈앞의 이익에만 ㅁ달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러나 우리는 잘못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가름해야 한다. 그것은 죄가 밉고 잘못을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서다. 용서와 화해는 그 다음의 문제다. 지금 추진하고 있는 적폐청산은 잘못된 관행을 뻐 아픈 기억으로 남기자는 것이며, 아울러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자는 의이어야 한다. 그 다음에 용서와 화해도 이야기 해보았으면 한다.

 송일섭 칼럼니스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