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학교의 탄생 (1)
근대 학교의 탄생 (1)
  • 정은균
  • 승인 2018.03.08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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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서는 최초의 근대 학교를 개화기에 설립된 육영공원(育英公院, Royal English School)과 원산학사(元山學舍)로 소개하고 있다. 1886년에 설립된 육영공원은 정부가 외국어를 해독할 수 있는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 아래 설립하였다. 좌우 양원으로 학급을 편성하였는데, 좌원에 나이 어린 정부 관리를, 우원에 양반 계층의 자제들을 수용하였다고 한다. 육영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국립학교였다.

 육영공원보다 시기적으로 더 앞서는 또 다른 근대 학교는 1883년에 민관 협력으로 함경남도 원산에 세워진 원산학사였다. 원산학사는 지방 관료들과 주민들이 힘을 합하여 설립한 최초의 근대식 사립학교였다. 신지식을 신세대에게 가르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밀려오는 서양 문물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처하게 하려는 건학 이념을 담고 있었다.

 도도히 밀려오는 서양 문물에 주도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당시 우리 민관의 노력은 근대 학교 시스템의 공적 제도화와 민족사학 설립 운동 등으로 확대되었다. 구국의 일념을 갖고 있던 민족 선각자들은 개화기 이후 국권이 흔들리는 위기 상황에서 국민 계몽을 통해 나라의 기운을 키우기 위해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구체적으로 1894년의 갑오개혁 이후 우리 정부가 정초한 학교관제와 규칙에 따라 소학교, 중학교, 사범학교, 상공학교 등 각종 학교들이 선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교육사 교과서들은 1883년부터 1908년에 이르는 15년 사이에 전국 사립학교가 경성 시내권의 100여개교를 비롯하여 총 5000여개교에 달했으며, 학생 수가 20만 명에 이르렀다고 적고 있다.

 19세기 말에 발아하여 20세기 초에 이르러 폭발하듯 성장한 이와 같은 근대 학교의 경험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당시 우리나라는 제국주의적 탐욕으로 무장한 서구 열강이 노도처럼 밀려오고, 동아시아 지역의 패권과 주도권을 잡으려는 이웃나라 청과 일본이 호시탐탐 국권을 노리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당대 조선의 최고 통치자는 고종이었다. 그에게는 개국 500년을 넘어선 오랜 국가의 유업을 유지하는 책무와 더불어 새로운 세기의 전환기에 능동적으로 맞설 수 있는 근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해야 하는 특별한 사명을 안고 있었다.

 고종은 상호 모순적으로 보이는 이들 두 가지 일의 해법을 교육에서 찾았다. 1895년 2월 2일 발표한 교육에 관한 특별조서에서 그는 “부강하고 독립하여 웅시(雄視)하는 모든 나라는 모두 다 그 인민의 지식이 개명하였도다. 이 지식의 개명은 곧 교육의 선미(善美)로 이룩된 것이니, 교육은 실로 국가를 보존하는 근본이라 하리로다”라며 교육입국을 향한 강한 의지를 웅변하였다. 한국교육사의 한 장을 비중 있게 차지하는 고종의 교육조서는 덕육(德育)과 지육(智育)과 체육(體育)을 앞세워 교육의 강기(綱紀)로 삼고, 학교 설립과 인재 양성을 통해 국가 중흥의 대업을 이루자는 뜻을 오롯이 밝혀놓고 있다.

 근대 국가의 기틀을 교육을 통해 다지자는 뜻을 담은 조선 국왕의 조서는 한낱 문서로만 남지 않았다. 최초의 현대식 학교 법규라고 할 수 있는, 1895년 4월 16일자로 제정된 <한성사범학교관제>를 필두로 <외국어학교관제>(1895년 5월 10일), <소학교령>(1895년 7월 19일), <한성사범학교규칙>(1895년 7월 23일), <소학교규칙대강>(1895년 8월 12일), <의학교관제>(1899년 3월 24일), <중학교관제>(1899년 4월 4일), <상공학교관제>(1899년 6월 24일) 등 각종 법규들이 만들어졌다.

 나는 고종의 교육 조서와 각종 학교 법규의 등장이 우리 식의 근대 교육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의 증거였다고 해석하고 싶다. 몇 가지 짚어볼 점이 있다.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인 국왕이 직접 조서를 통해 교육 입국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밝혔다. 그런 만큼 우리는 새로운 교육 체제를 수립하려는 당대의 노력과 실천이 체계적인 계획과 물적 기반을 토대로 이루어졌으리라 기대할 수 있다. 아쉽게도 고종의 교육 조서 이후에 펼쳐진 교육 개혁 작업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학교 법규에 새겨진 근대 학교를 향한 계획은 야심찼다. 예를 들어 만 8세부터 만 15세까지의 8개 학년을 학령으로 하는 소학교는 오늘날의 초등교육기관에 해당하는 학교였는데, <소학교령>에서는 전국의 각 부군(府君)이 관내 해당 학령 아동을 취학시킬 공립소학교를 설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규정해 놓았다. 이는 지방공공단체가 공비로 학교를 세워 아동들을 교육시키게 하려는 시스템으로서, 일종의 국민의무교육제도에 버금가는 시스템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일본과의 보호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소학교령>에 따라 세워진 소학교는 수도 10개교와 지방 50여개교를 합해 60여개교에 불과할 정도로 영성했다. 실제 학교 운영 현황 역시 엉성한 점이 많았다. <소학교령>이 공포된 이듬해인 1896년 2월 <보조공립소학교규칙>을 공포하여 공립소학교에 대한 국고금 보조를 법적으로 강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 부군에 소재한 학교들은 정부 보조를 제대로 받지 못하여 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열악한 시설에서 소수의 무자격 교사들이 교육 활동을 수행한 당시 지방 소학교 중에는 이름만 학교일 뿐 구래의 서당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곳이 많았다. 교사 한 사람이 낡은 가옥에서 10명에서 50여 명에 이르는 학생들을 데리고 한문을 주로 가르치는 식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근대 학교의 태동기 역사를 범박하게 살핀 이상의 결과만을 놓고 그 교육사적인 의의를 서둘러 평가하는 데 무리가 있음을 안다. 다만 당대의 교육 개혁 과정을 휘갑하면서 한 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 나라의 교육 개혁이 거국적인 의식 개혁 운동과 함께할 때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고종의 교육 조서와 이를 뒷받침하는 각종 학교 법규에도 불구하고 지지부진하기만 했던 공립학교들과 달리 경향 각지에서 자생적으로 설립된 선교계 사립학교들이 크게 발전한 것을 그 방증으로 들 수 있다.

정은균(군산 영광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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