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과 3·1인민봉기의 역사적 계승
3·1절과 3·1인민봉기의 역사적 계승
  • 이윤영
  • 승인 2018.03.04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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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1일은 3·1절 99주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99년 전에 천도교·기독교 ·불교의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가 발표됨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산하였다. 3·1운동은 민족대표라는 종교계의 대표를 중심으로 준비와 시작이 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역시 전국으로 확산한 과정도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인들이 중심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3·1운동 이후 26년, 일제로부터 해방되었고, 해방이후 1년여 과정을 거치면서 외세와 이념의 원인으로 남북이 분단되었다. 그런데 분단이후 남북은 각기 3·1운동에 대하여 다른 평가와 계승이 있었다.

 우선 명칭부터 다르다. 남측은 3·1절 또는 3·1독립운동, 북측은 ‘3·1인민봉기’라는 명칭으로 불려왔다. 또한 남측은 ‘3·1절’이라는 국경일로써 정부(지방자치단체포함)와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비중 있게 치른다. 북측은 남측 즉 대한민국의 경우처럼 국경일은 아니지만, 예를 들어 ‘3·1인민봉기 99돌 평양시 보고회’라는 이름으로 기념행사를 치른다고 알려졌다. 이러한 경향은 3·1운동이 계승한 동학농민혁명의 명칭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남측은 ‘동학혁명,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전쟁’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른다. 북측은 ‘갑오농민전쟁’이라는 단일 명칭을 사용한다. 이는 남북한 이념의 차이와 역사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입장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3·1절 99주년 행사에 북한종교인협의회에서 남측 천도교와 종교계에 보낸 축사의 일부를 소개한다.

 동계올림픽경기대회를 성대히 치른 기쁨에 넘쳐 있는 때에 서울에서 3·1인민봉기 99돌 기념행사가 성대히 개최되는 데 대해 뜨거운 동포애의 인사를 보낸다. 3·1인민봉기는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일제식민통치에 항거한 반일애국항쟁이었다. 그러나 아직 우리민족은 외세에 의해 강요된 분열의 비극을 끝장내지 못하고 있다. 외세는 남북관계를 전환해나가려는 우리 겨레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으면서 이 땅의 평화를 위협한다. 일본은 식민지 지배 최악을 반성하는 대신 군국주의 부활과 영토강탈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오늘 우리 민족은 힘이 약해 열강에 국권을 빼앗기고 독립만세나 애타게 부르짖던 약소민족이 아니다. 슬기롭고 막강한 국력을 가진 민족이다. 지금이야말로 온 겨레가 3·1인민봉기자들처럼 분연히 떨쳐 일어나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통일의 대통로를 열어나가야 할 때다.]

 이와 같이 북측이 보낸 3·1절 축사를 살펴보면 남측과 다소 다르게 3·1운동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또한 어떻게 계승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3·1운동 1백주년에는 통일선언서가 발표되길 바란다.

 내년(2019)이면 3·1운동 1백주년의 해이다. 3·1운동백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의 주최로, 올 3·1운동 99주년에 남측 종교계에서는 서울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북측이 보낸 축사를 낭독했으며, 북측에서는 남측이 보낸 축사를 평양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교당에서 열리는 조선종교인협의회 3·1절 기념행사에서 낭독한 것으로 알려졌다. 올 99주년에는 남북이 각기 축사를 보내는 것으로 기념식을 열었지만, 내년에는 꼭 합동기념식이 열렸으면 한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3·1독립선언서가 발표되고, 3·1운동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던 것처럼, 현재 분단시대에 3·1운동 1백주년을 기해 남북합동 ‘통일선언서’를 발표함은 물론 통일임시정부에 대한 본격 논의가 되었으면 한다. 세상일의 성사는 준비하는 자들에게 돌아간다. 또한 온갖 갈등과 대립이 있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 속에서 화합과 일치의 길이 열린다. 이제 남북이 하나 되어 민족의 숙원인 평화통일의 세상이 성큼 다가왔으면 하는 꿈과 희망을 가져본다.

 이윤영<동학혁명(백주년)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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