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바라기와 전주 우뚝이’
‘서울 바라기와 전주 우뚝이’
  • 최정철
  • 승인 2018.02.05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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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년 어느 날. 전주 한옥마을 짱골목(극장골목) 안의 전주극장. 어둠 속 희미한 조명 아래. 관객은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고 무대에서는 배우의 독백이 흐른다.

 “내 몸둥아리에 죽음이라는 이름의 화려한 상장(喪章)을 둘러 마지막의 내 호흡이 끊어진다면 나와 동일한 다른 운명의 소유자가 나의 독백을 이어받아 나의 독백은 두고두고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의 독백, 인간의 독백은, 지구의 운명이 마지막 될 때 역시 지구의 운명과 같이 할 것이다!”

 광복 이후 전북 지역에서 현대 연극사의 첫 막을 올리던 이 독백. 이 독백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당대 최고의 연극인이었던 유치진과 쌍벽을 이루면서도 명예와 부귀, 정치적 행보에 바빴던 그와는 달리 고독하고 외로운 연극인의 길을 걸었기에 오늘 날 만인의 뇌리에 제대로 각인되지 못한 사람. 전북 연극의 산파요 개척자였던 사람. 그가 곧 박동화(본명 박덕상, 1911~1978)요 이 독백은 그의 대표작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의 한 구절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경성 ‘조선연극협회’의 신극운동 참여, 도일(渡日)하여 ‘동경학생예술좌’에서의 극작과 연출 분야 수업, 귀국 후 연극 <수전노> 출연, 희곡 <수해 후> 발표 등으로 젊은 시절을 보낸 그는 1956년 전북대학교 신문사 편집국장으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전주와의 인연을 맺는다. 그가 ‘전북대 극예술연구회’를 중심으로 연극인의 길을 걷게 될 당시의 전북 지역 연극판은 전북대 극예술연구회가 외롭게 분투하고 있었고, 그나마 전북대학교 개교 기념 공연이나 전라예술제 참여 등 고작 1년 2~3편 발표라는 척박한 환경에 처해 있었다. 1959년 국립중앙극장에서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가 공연되어 주목을 받기 시작한 박동화는 평소 염두에 두고 있던 한 사람을 떠올린다.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 수묵화로 천부적 재능을 인정받은 이래 가장 한국적이고 민족적인 작품으로 동서양 융합을 시도한 동양의 피카소 하반영(1918~2015).

 그는 무대미술을 전담할 하반영을 전주로 불러들였고 둘은 짱골목에서 탁백이국을 먹으며 의기투합한다. 이제 박동화는 전주 연극의 새로운 출발점을 잡고자 당시 서울에서 개최되고 있던 전국연극경연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하반영과 함께 ‘전북대 극예술연구회’ 출신 몇 사람을 모아 ‘창작극회’를 결성한다. 그리고 1964년 5월, 국립중앙극장에서 개최된 전국연극경연대회에서 자신의 희곡 <두 주막>으로 최우수상을 거머쥔다. 그로써 ‘창작극회’는 이후 전국적인 최고 극단으로서의 위상을 자랑하면서 전주와 전북 지역에 연극 문화의 큰 탑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희곡작가이자 연극연출가였던 박동화는 그렇게 전북의 현대 연극사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영웅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박동화 사후 1980년대 이후의 전주 연극은 과연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볼 때 분명 그렇지 않다는 답이 들릴 것이고, 필자는 대략 두 가지 관점으로 그 이유를 대신하고 싶다. 첫째, 전주 연극인들의 ‘서울 바라기’다. 1980년 중반, 연극 작가로 연극계에 데뷔한 필자에게 있어서 1980년대 한국 연극계는 양적 발전을 이룬 시기이면서 그에 맞춰 전국 각지의 연극인들이 대거 서울로 모여든 때로 기억된다. 그 반대급부로 지방 공연단체들은 생존에의 절체절명 위기에 빠져야 했고 그나마 지방에 남아있던 공연단체들은 앞 다투어 서울의 연극 풍조를 모방하기 급급했다. 그 와중에 1980년대 이후 전주 연극인들은 과연 서울 모방과 결연히 담을 쌓은 채 전주 연극의 정체성을 유지해왔는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둘째, 서울 바라기의 또 다른 이유가 될 전주 연극인들의 배척감정이다. 자의든 타의든 전주를 떠나 세상을 풍미한 전주 출신 배우들이 한 둘 아니다. 대표적으로 최선자, 우연정, 정윤희 등을 들 수 있다. 이 배척 감정은 연극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니 소설가로 양귀자와 최명희가, 한국 현대무용의 원조 격일 육완순이 이에 해당된다. 왜 전주의 예인들은 그들을 품지 않았는가? 왜 떠나간 그들을 다시 품어 함께 작업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가? 박동화는 전주 출신도 아닌 김천 사람을 불러들여 전주의 꽃을 피웠건만.

 필자는 축제일을 업으로 삼다 보니 다분히 연극제에 감흥이 꽂힌다. 기존의 전주연극제도 좋지만 기왕이면 ‘박동화연극제’로 단장해서 더욱 풍성하고 기름지게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해마다 전주 연극인들이 전주체련공원의 박동화 선생 흉상에 모여 전국연극제 출전을 고하기보다는 전국의 연극인들이 한국의 셰익스피어 박동화 선생 흉상을 찾아와 박동화연극제에의 참여를 고하게 하기. 서울 바라기가 아닌 전주 우뚝이로서의 위상을 높여보기. 탈 많았던 전주대사습놀이도 새 걸음을 걷게 되었고 전주영화제도 문제없이 잘 치러지고 있으니, 이제는 연극 분야로 눈을 돌려 전주 연극인의 이름으로 박동화의 독백을 이어받아 그의 독백이 끝나지 않도록 전주의 체향으로 전주 연극의 꽃을 다시 한 번 만개시켜봄이 어떠할까? 대한민국 공인 예향(藝鄕)이요 문화특별시 전주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 글 = 최정철 문화기획자·축제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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