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과 양심의 몰락’, 단호하게 추궁해야
‘지성과 양심의 몰락’, 단호하게 추궁해야
  • 송일섭
  • 승인 2018.02.01 1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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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사람도 자신의 행적을 다 기억할 수는 없다. 날마다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하나 둘 잊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런 망각을 신이 내린 축복이라고 한다. 자신이 겪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전부 다 기억하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일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의 삶에 커다란 계기와 반전을 가져다 준 일은 결코 잊지 못하는 법이다.

 지난 1월 27일 SBS의 시사교양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 1109회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사라진 고문 가해자들’ 편이 방영되었다. 불법수사와 고문으로 조작된 김제 최을호 씨 일가의 간첩단사건, 진도 허현 씨 가족간첩단 사건, 제일교포 이현치 씨의 간첩사건 등을 재조명하였다.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재심을 통해 모두 무죄로 판명되었다는 점이다.

 김제의 최을호 씨는 강압과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으로 스스로 간첩이 되어 사형을 당했고, 그의 아들들 또한 불행한 죽음을 맞이했다. 작년에는 재심을 통해 무죄로 판명되었음에도 그의 큰 아들 또한 숨진 채로 발견되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이들에게 억울한 죽음을 강요했던 고문 가해자과 사건을 지휘했던 검사들, 그리고 법복을 입고 판결했던 판사들은 지금 어디서 무었을 할까. 자신들이 수사했고 자신들이 재판했던 사건들이 무죄로 판명되는 작금의 상황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제작진은 당시의 수사관들이나 검사, 판사들을 찾아내어 그 심정을 물어보면 그들은 하나 같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신이 내린 선물 ‘망각’의 덕을 톡톡히 본 것일까. 그러나 그들의 그런 대답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당시 간첩단사건 조작 등을 통해서 엄청난 신분상의 혜택을 누리면서 승진가도를 달렸다. 자신들의 삶에 극적 반전을 가져다 준 일을 그들 스스로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들은 하나같이 ‘모르쇠’로 일관했으며, 국회의원 아무개는 “웃기고 앉아 있네”라는 말로 비아냥거리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그날 시청자들은 이런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 개인의 삶을 철저하게 짓밟고 가족들까지 불행의 늪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이 어찌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을까. 아마 한때는 그들도 법과 정의를 말하면서 이 땅의 지성과 양심의 보루가 되고자 했을 것이다. 부패한 권력과 영합하면서 일신의 출세와 영달을 위해서 ‘받아쓰기’에 급급했던 지난날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일까. 재판정에서 강압과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라고 밝혔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부패한 정권의 입맛대로만 몰고 갔다. 그날 방송에서 거론된 거물급 인사들의 실명을 들으면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뼈아픈 성찰이 없는 그들의 민낯이 두려웠다.

 왜 이런 일이 오랜 시간이 흘러도 계속되는가. 그것은 우리의 불행한 역사와 맞물려 있다. 잘못된 역사에 대한 청산이 단 한 번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다. 잘못된 판단이나 정책은 언제나 국민을 불행하게 하였지만, 한 번 힘 잡은 자들은 국민의 불행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승승장구했다. 게다가 우리는 그런 자들을 지도자의 반열에 올려놓은 바보짓을 여러 번 해 왔다. 약한 백성들이 불법수사와 고문에 의해서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있을 때, 저들은 살만한 세상이라며 떵떵거리고 있었다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는가. 이런 것들이 요즘 회자되는 ‘적폐’다. 일부에서는 ‘정치보복’이라며 어깃장을 놓지만, 파당적 편협함을 버리고 과거의 잘못에 대해 추상같은 책임을 이야기할 때다. ‘모르쇠’로 전락한 ‘지성과 양심의 몰락’에 대해서 더 단호해질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국민 모두가 당당하고 살맛나는 세상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송일섭(수필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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