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성의 계절
숙성의 계절
  • 백형호
  • 승인 2018.01.29 16: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난히 추운 계절이다. 연일 영하 20도를 내려가는 서울은 ‘서베리아’라고 서울과 시베리아가 합성된 모습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다. 낙엽을 떨구어 버리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도 춥다고 고개를 저으며 휘파람을 불고 있다. 만물이 추워 떨며 움츠려드는 얼어붙은 계절. 산과 강, 하늘도 칼날 같은 찬바람이 매섭다. 사람도 춥다고 겹쳐 입은 옷 만큼 속으로 파고 들어가며 숙성되어가는 계절이 깊어가고 있다.

세상에는 제 맛을 내기 위해서는 숙성이 필요한 것들이 있다. 고기를 맛있게 요리해 먹는 방법 중에 하나로 간을 적절히 하여 일정 시간동안 냉장고에 숙성을 시켜 먹는 방법이 있다. 흔히 대하는 치즈, 고추장, 청국장, 와인 등등. 이들도 제대로 숙성되면 얼마나 맛있고 우리 입맛을 당기는가. 언젠가 청국장이 제대로 숙성되지 않는 것을 구해 먹었다가 그 이상하고 역한 냄새에 그 후유증을 길게 느꼈던 기억이 있다. 반면 어느 유명한 관광지에서 구했던 잘 숙성된 와인이 너무도 깊고 오묘한 맛이 입안에서 오랫동안 감돌던 기억도 있다. 제대로 숙성되지 못하여 부패한 것과 잘 숙성된 것과의 대조는 얼마나 극명한가.

사람도 성숙을 지나 숙성된 모습을 갖추게 되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생각해 본다. 인간은 시간이 흐르면 육체적 성장이 이루어져 성숙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러면 우리 모두 그대로 아름다운 어른이 되는 것일까? 오랫동안 사랑받는 감칠 맛 나는 성숙된 인간이 되는 것일까. 정신적인 성숙과 나아가 영적인 성숙을 거친 후에는 아마도 제대로 숙성 과정을 거쳐야 진정한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닐까. 몸은 성장했어도 정신적인 면에서나 문화 예술적인 면과 나아가 영적인 면에서 조화롭게 성숙한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면 아직은 숙성이 안 된 음식과 같다. 숙성시키기 위한 음식이 온도와 환기들이 적절하게 맞지 않으면 숙성이 잘못되어 부패하게 되고 그 냄새를 맡게 되면 악취를 내게 된다. 부패한 음식은 처리하고 제거해버리면 된다. 하지만 숙성이 어설프거나 부패한 인간이 내뿜는 악취는 그 여운이 쉽게 사라지지 않고 우리 삶의 주변에 탁류를 흐르게 하며 이맛살을 찌푸리게 한다.

나무는 이 계절에는 성장을 서두르지 않는다. 나이테를 굵게 키우기 보다는 단단하게 다지고 있다. 저 너른 들은 벼들을 품에 앉고 기르지 않고 지심을 높이기 위해 깊은 호흡을 쉬고 있다. 새들도 하늘을 가벼이 날아다니지 않고 나래를 접은 채 둥지에서 새봄을 기다리고 있다. 불가에서는 책을 잡고 공부하는 것은 책을 놓고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함이라고 하였는데, 지난 일 년간 바쁘게 지내온 우리 학생들은 그 모든 학습을 이 추운 계절에 자신들의 내면으로 잘 숙성시키고 있을까. 지난 학기 선생님과 친구들 그리고 부모님들의 소망이 우리 아이들 마음속에서 발효되어 아름다운 자아로 숙성되고 있을까. 이 추운 계절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익산 함라중학교 교장 백형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