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반성과 진솔한 희망 찾기
자기반성과 진솔한 희망 찾기
  • 이문수
  • 승인 2018.01.07 15: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라도는 산세가 수려하고 끝없이 펼쳐진 곡창지대와 남서해안 갯벌이 있다. 특히, 전북은 섬진강, 만경강 등 5대 강의 발원지이고, 다른 지역보다 풍부한 물을 가졌다. 이것들이 주는 풍요로움을 기반으로 맛과 멋, 풍류가 넘쳤다. 그래서 전라미술은 여유로운 서정성이 충만하다.

 오는 22일까지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에서 <천년, 흐르는 물> 展이 열린다. 전라도 정명 천년을 맞아 소장품 중심으로 자연주의적인 서정성을 담고 있는 작품으로 구성한 신년 기획전이다. 소박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고, 탁월한 미감과 품격을 가진 작품들로 구성했다. 여기에는 은근과 끈기로 완곡한 변화를 즐기는 전라인의 온화한 성품이 녹아 있다. ‘천년, 흐르는 물’은 변화를 말한다. 변화는 마르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상생하는 힘이 있다.

 인간은 역사를 만들어 가지만, 개인이나 집단의 주관적인 희망으로는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주어진 상황에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한번 만들어진 구조가 영원한 것은 아니고, 능동적으로 세계를 재구성하면서 변화시켜 나간다. 변화 과정은 익숙한 것들과 결별해야 하는 불편함을 동반하지만, 진솔한 희망은 더 나은 세상을 향해 흐르는 물처럼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현대사회에서 예술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자기반성의 창’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은 자신을 반성하는 사고에서 출발한다. 스스로 판단과 선택, 습관적인 행위를 무조건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되짚고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현대인의 반성하는 사고 결핍은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다. 극단적인 경쟁 사회에서 자신을 우수한 상품(?)으로 만들기에 여념이 없고, 신분 상승 사다리에 오르기 위해 대부분 삶을 쏟아붓는 상황에서 내적인 자기반성은 뒷전으로 밀리기 마련이다. 사회적 지위, 거주하는 동네, 집 크기, 멋진 자가용, 옷이나 가방 브랜드가 곧 자신이다. 그래서 예술과 만나야 할 내면 공간이 너무나 비좁다. 또한, 현대인은 지식의 홍수, 정보의 바다에서 살지만 정작 정신적인 빈곤 상태에 놓여 있다. 결국, 지식은 증가하지만 동시에 무지의 골도 깊어가고 있다.

 임제 선사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고 말했다. 부모나 친척을 죽이라는 말은, 태어나서 청소년 시기까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치관과 가족 이기적인 윤리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경고이다. 스승을 죽이라는 말은, 십여 년이 넘게 제도교육 속에서 주입받은 사회 주류 담론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부처를 죽이라는 말은, 종교적 도그마만이 아니라 막강한 권위를 누려온 모든 이념이나 사상을 의심해 보라는 말일 것이다.

 기아를 포함해서 절대 빈곤 상태에 처한 인구가 12억 명에 이른다. 현재까지도 하루 2만5천 명이 영양실조와 기아에서 얻은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배고픔이 가난의 조건이라면 가난에서 벗어난 한국사회에서는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경쟁에서 이기고 신분 상승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다. 워낙 오랜 기간 우리 내면에 스며들어 있기에 당연시한다. 중산층은 상류층의 끄트머리라도 잡고 싶어 몸부림친다. 올라가지 못하면 그렇게 보이기 위해 포장이라도 한다. 마찬가지로 서민층은 중산층으로 갈 수 있는 기대를 한시도 놓지 못한다. 현실은 더 내려갈 곳 없이 바닥에 붙어 있지만, 기대는 도시의 공중 위에서 정처를 찾지 못하고 부유하고 있다.

 상황이 힘겹다고 엎드려만 있을 수 없다. 세계는 완결적이지 않고, 결코 정지해 있지 않다. 본질은 고정이나 안정이 아니라 변화다. 엎드려 있는 곳에서 일어나 자유로운 발상과 만나야 한다. 예술을 통해 고정된 틀 안에서 맴도는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창 너머에 있는 진솔한 희망을 찾자. 그러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선과 발상으로 사유를 전개하고 있는 ‘인문학의 꽃’, 예술을 만나는 일이다. 그 만남을 위해 우리가 먼저 나서야 한다.

 이문수<전북도립미술관 학예실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