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시] 박은영의 ‘인디고’
[신춘문예][시] 박은영의 ‘인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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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2.27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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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디고

 
 빈티지 구제옷가게,
 물 빠진 청바지들이 행거에 걸려 있다
 목숨보다 질긴 허물들
 한때, 저 하의 속에는 살 연한 애벌레가 살았다
 세상 모든 얼룩은 블루보다 옅은 색
 짙푸른 배경을 가진 외침은 닳지 않았다
 통 좁은 골목에서 걷어차이고 뒹굴고 밟힐 때면
 멍드는 건 속살이었다
 사랑과 명예와 이름을 잃고 돌아서던 밤과
 태양을 좇아도 밝아오지 않던 정의와
 기장이 길어 끌려가던
 울분의 새벽을 블루 안쪽으로 감추고
 질기게 버텨낸 것이다
 인디고는
 인내와 견디고의 합성어라는 생각이 문득 들 때
 애벌레들은 청춘의 옷을 벗어야 한다
 질긴 허물을 찢고 맨살을 드러내는
 각선의 방식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대생들이
 세상을 물들이며 흘러가는 저녁의 밑단
 빈티지가게는
 어둠을 늘려 찢어진 역사를 수선하고
 물 빠진 허물,
 그 속에 살았던 푸른 몸은 에덴의 동쪽으로 가고 있을까
 청바지 무릎이 주먹모양으로 튀어나와 있다
 한 시대를 개척한 흔적이다

 *인디고: 청색염료.

 
       ▶ 당선 소감 박은영씨(40)

 일흔다섯을 바라보는 아버지, 뒤꼍에서 톱질을 하고 계신다. 이 산 저 산에서 모은 고사목의 곁가지를 잘라내고 같은 크기로 토막을 내는 동안 목장갑 낀 손으로 허리를 두드리고 이내 가쁜 숨을 돌리고……돌이켜보니, 아버지의 그 넓던 어깨가 오그라들도록 나는 따뜻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불효막심하게 시만 썼구나. 내 시가 화목보일러 숯불보다 뜨겁기를 바라며 누군가의 가슴을 덥혀 주리라 고집하며, 아궁이에 들어가면 흔적도 없이 타버릴 종이를 끌어안고 말이다. 겨울이 돌아올 때마다 방은 춥지 않느냐는 말로 불쏘시개를 대신하던 아버지, 노송가피 같은 손등과 톱밥 묻은 눈 밑과 근심으로 얼룩진 옷소매가 이제야 보이는 것이다.

 당선소식을 듣고, 나 대신 주변 사람들이 울어주었다. 좌골이 닳도록 기도로 밀어주신 엄마, 언제나 소녀 같은 언니,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은 오빠, 사랑하는 조카들, 함께 동행해준 기독교시동인님들, 나주안디옥교회 일당백의 성도님들……그리고 나의 아들아! 네가 내 속에서 나와 세상 앞에 굴하지 않고 멋지게 헤쳐 나가는 모습이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힘들 땐 하늘을 바라보라는 약속, 잊지 말자.

 문을 두드린 지 열두 해다. 소재호 석정문학회 회장님께서 감사하게도 문을 열어주셨다. 앞으로 겨우살이 땔감을 준비하는 노부의 마음으로 시를 써야겠다. 하지만 결코, 추운 이들의 가슴에 군불을 지필 수 없다는 것을 알만한 나이테를 가졌다는 것이 슬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이 한 장의 시간보다 길게 불꽃을 피워 올려 언 손이라도 녹여줄 시집 한 권을 남겨보리라 다짐해본다. 재능보다 인내를 주신, 가장 낮고 작고 천한 자의 주인인 하나님께 이 모든 영광을 돌린다.

 
       ▶ 심사평 소재호 시인·문학평론가

 금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에는 170여명에 500여 작품이 응모되어 팽팽한 경쟁을 보였다. 신춘문예에 응모되는 작품들은 대개가 작가들의 무한한 문학적 체험과 연마를 거쳐 정제된 산물이어서 이미 시의 품격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이번 응모된 작품들 중에서는 시제 ‘인디고’‘그림자는 저체온증’‘지렁이 다비식’‘필사의 밤’‘ 주홍날개꽃개미’‘북해의 공작시간’ 등에 시선이 매우 끌렸다. 모두 시적 체제는 잘 갖추어져 있었다.그러니까 이 작품들이 최종심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약간씩의 아쉬운 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인디고’는 수준이 매우 높아서 당선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인디고’는 쪽에서 나온 남색이라 했다.색깔을 시 제목으로 내거는 자체부터가 이미 범상함을 벗는다.이 시는 역사적 현실을 배경으로 한다.절제된 감성으로 주조된 서정성을 바탕으로 어둔시대를 견인하는 서사적 정경이 오버랩된다.블루의 색소가 인상적으로 내비치며 인상파 그림의 구도와 명암이 쉬르리얼리즘의 경역도 넘나든다. 제재들은 자꾸 대칭하며 조화해 가는,아이러니와 패러독스가 시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청춘이 선호하는 낡은 청바지...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그리고 얼마나 심대한 이미지의 부딪침인가.

 현대의 세대가 옛 세대를 끌고 와서 한 시공에 두어 충돌과 융합을 자아낸다. 결기 높은 시이다. 청바지는 낡아서 무릎이 나와야 한다. 이 청바지는 그대로 상징성의 총화이다.

 동서양의 만남이며 이는 또한 시공을 달리한 문화의 충돌이자 혼융이다. 이 때 하의 속 애벌레가 절묘한 시점에 등장한다. 애벌레는 장차 성충이 될 터이다.매미처럼 어둠을 털고 일어나 허물을 벗고 마침내 푸른 미래의 하늘을 날 것이다.

 “어둠을 늘려 찢어진 역사를 수선하고...한 시대를 개척한 흔적”의 시구가 청바지에 얼마나 적확하게 부합하는가.

 

 ◇소재호 시인·문학평론가

 현대시학 등단 / 완산고등학교 교장, 전북문인협회 회장, 석정문학관 관장 역임 / 시집 ‘초승달 한 꼭지’등 다수 / 목정문화상, 성호문학상, 녹색시인상 등 다수 / 현 표현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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