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정류장은 봄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봄입니다”
  • 이동희
  • 승인 2017.12.19 16: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사의 교훈을 외면하는 민족은 역사적 치욕을 되풀이 당한다’는 지적은 역사학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유효하다. 그래서 개인사나 민족사, 나아가서 국가적으로 당한 역사적 치욕에 대해서,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 것’을 다짐하기도 한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사를 붙들고 미래로 끌고 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서가 붙는다. 그 치욕스러운 역사를 철저히 단죄하는 것이 먼저이고,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긴 자들이 진정으로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이 그다음이다. 그랬을 때 비로소 그 잘못된 치욕의 과거사를 자행했던 당사자들을 용서는 하되, 그 치욕의 역사를 가슴에 담아두는 일은 성숙한 개인이나 집단의 몫으로 남게 된다.

 딱 1년이 필요했다. 무너진 헌법 정신을 바로잡아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그 헌법의 주인인 국민이 제대로 된 주권을 행사할 기회를 마련하는데. 저 지난 9년 동안 국정은 불법으로 농단 되었으며, 주권은 철저히 무시당한 채 ‘내편-네 편’으로 갈림을 당했다. 민주정권 10년 동안 쌓았던 평화무드는 어디로 사라지고, 언제 촉발될지도 모르는 전쟁의 두려움 속에 나날을 보내야 했다. ‘갑질문화(?)’는 가지지 못한 국민들에게 삶의 의욕을 앗아갔으며, 청년들은 3포시대-4포세대를 양산하는 지경으로 급락했다. 오죽했으면 21세기 현대를 문맹의 왕조시대에 비겨 ‘헬[지옥]조선’이라며 자조했겠는가?

 그랬던 일련의 ‘어둠’을 우리는 한 마디로 ‘적폐(積幣-오랫동안 쌓여 온 폐단)’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적폐청산’을 우리 시대의 제1과제로 삼는데 거의(소위, 태극기 세력이라고 불리는 일부 국민을 제외하곤) 모든 국민이 동의하였다. 당연하게도 적폐는 사회 곳곳에 쌓여 엄청난 불협화음을 내고, 고약한 악취를 풍기면서 우리의 삶을 오염시켰다. 그런 적폐가 단 하나라도 제대로 청산된 적이 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벌써 적폐청산의 피로감을 입에 올리기 시작한다.

 우리 역사에서 이렇게 적폐를 제때,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업보가 오늘의 혼란상을 가져왔음을 의식 있는 국민은 안다. 외적의 침략에 동조하여 제 민족을 탄압하는데 앞장섰던 친일 세력들에 대한 단죄, 전쟁의 참화 속에서 궁핍한 동포를 이념의 덫을 씌워 학살한 자들에 대한 단죄, 군사 독재의 앞잡이가 되어 민주주의를 짓밟고 주권자를 탄압했던 독재 부역세력에 대한 단죄, 그리고 민주화의 함성에 국민의 군대를 앞세워 국민을 살육했던 살인마들에 대한 단죄를 제때, 제대로 수행하지 못함으로써, 불의와 독선이 정의와 양심을 짓밟으면서도 뻔뻔스럽게 대로를 활보하게 하고 말았다.

 나치에 협력했던 자들을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그 범죄자의 나이가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엄한 형벌로 다스리는 독일의 사례를 들 것도 없다. 아직 단 한 사람도 진정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국민 앞에 석고대죄[席藁待罪-거적을 깔고 엎드려 처벌을 기다림]하는 자가 없는 상황에서 누가 적폐청산의 피로감을 들먹일 수 있는가?

 석고대죄는커녕 오히려 적반하장의 형세로 청산 작업에 어깃장을 놓는 시국을 지켜보는 일은 의식 있는 국민들에게는 괴로움 그 자체가 되고 있다. 저들의 저항이 얼마나 철부지인가를 가늠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 누구도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일이다. 적폐의 어둠과 악취를 청산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새 시대를 맞을 수 없다. 겨울이 길면 봄도 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봄은 적폐 세력들의 계절이 아니라, 바로 ‘나라다운 나라’를 열망해온 새 시대의 촛불[희망]이어야 한다.

 “차내 입구가 몹시 혼잡하오니/ 다음 손님을 위해서 조금씩/ 안으로 들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승객 여러분/ 봄 여름 가을/ 입구에서 서성대고 계시는/ 승객 여러분/ 입구가 몹시 혼잡하오니 조금씩/ 안으로 들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갈 봄 여름 없이/ 가을이 옵니다/ 다음 손님을 위해서 조금씩/ 겨울로 들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정류장은 봄입니다”-(차창룡의 시「소화消化」전문) 우리는 잠시도 쉬지 않고 어디론가 실려 가는 승객일 뿐이다. 그러니 운전기사[역사]의 독촉을 받기 전에, 내려야 할 정류장이라면 내려야 한다. 어차피 ‘봄’은 겨울의 어둠을 이겨낸 ‘승객[주권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동희<시인/문학평론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