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때문에 난징에 남은 김주연 화가
사랑 때문에 난징에 남은 김주연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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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2.13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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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쑤의 한인사회>
 김주연 화가와 난징 푸바오스(傅抱石)기념관에서 만나기로 했다. 소란스러운 도시를 벗어난 작은 언덕 위에 자리잡은 집이었다. 소박한 응접실에서 김 화가와 그녀의 남편 황거(黃戈)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김 화가는 16년 전 배움의 길을 찾아 한국 대구에서 난징으로 유학 왔다. 지금은 다문화 연구자와 직업 화가로 거듭났다. 이곳에서 그녀는 예술과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푸바오스기념관 부관장인 황거 화가였다. 두 사람은 중·한회화교류사를 같이 연구하며 중국 전통회화의 혁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 화가는 한국에서 중국화를 전공했다. “중국 전통회화, 특히 문인들이 그린 그림은 한국 역사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칭화대에서 중국어를 연수하였으며 중앙미술대학교 중국화학과 산수화전공 대학원에 순조롭게 진학하였다.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깜짝 놀랄만한 결단을 보여줬는데 자퇴해서 난징예술대 디자인학과 대학원 시험을 다시 본 것이다. “난징을 좋아합니다. 과거 난징을 관광한 적이 있는데 이곳이 저한테 더욱 잘 어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난징예술대에서 그녀는 칠화를 배웠다. 나중에 또 유명 학자 저우지인(周積寅) 선생의 문하에서 박사과정을 밟았고 중국과 한국에서 ‘아집도(雅集圖)’ 소재의 역사적 연원과 전파를 연구하였다. 이때 지도교수 저우지인 선생은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소개시켜 주었다. 그녀 또한 중국 전통회화에 대한 황거의 해박한 지식과 열정에 매료되었다. 반년 후 그들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하고 나서 그들은 학생 기숙사에서 살면서 매일 학교 식당밥을 먹었다. 주택을 해결하기 위해 둥난대학교 박사후 과정까지 밟았다. “예술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김 화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부인이 난징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위탁 교육생이었던 남편은 위약금까지 지불하면서 난징에 남았다.

 “난징에 처음 왔을 때 한커우서로(漢口西路)에서 살았고 이곳의 나무와 인문환경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김 화가가 말했다. 인연이 닿으려고 했는지 남편이 근무하는 푸바오스기념관이 한커우서로에 위치했고 맞은 편은 난징사범대였다. 현재 그들은 기념관에서 가까운 한커우서로에 생활의 터전을 잡았다.

 연구하고 그림 그리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며 가끔 사생하러 나가기도 한다. 두 사람이 함께 저술한 『중화 바람에 서서히 물들다?중·한 회화 교류의 역사』는 중국에서 최초로 중·한 회화 교류사를 전면적으로 보여준 작품이며 중국 문화부, 중국 박사후기금 등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고 업계 전문가의 인정까지 받았다. 미술사론가 고 왕보민(王伯敏) 교수는 병석에서 제목 글씨를 써줌으로써 두 젊은 친구를 격려했다. 두 사람이 같이 그린 산수화는 중국 산수의 필묵과 한국 회화의 색채를 융합해 중묵중색(重墨重色)의 신선한 화풍을 형성하였는바 미술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왔다.

 김 화가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지만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해 기자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녀는 난징에서 16년 동안 살면서 이 도시와 하나가 되었다. 그녀는 중·한 양국 문화 교류는 역사가 매우 길다고 하였다. 최근 몇 년간 해마다 중·한 양국 회화 교류전을 기획하였고 심지어 한국민간악단의 난징 공연까지 기획하였다. 12월 초 그녀의 작품은 홍콩에서 전시되기도 하였다. “난징에 와서 필묵과 인연 맺은 것을 큰 행운으로 생각합니다. 저와 남편은 앞으로도 계속 글 쓰고 그림을 그려나갈 것입니다. 필묵이야말로 저희에게 예술의 전당입니다.” ‘주련벽합(珠聯璧合: 구슬과 옥의 만남)’이라는 말이 두 사람에게 가장 잘 어울렸다.

  장훼이칭·張會淸 글/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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