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의 왕이 된 토머스 립턴
홍차의 왕이 된 토머스 립턴
  • 이창숙
  • 승인 2017.12.10 14: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19>
콧수염과 물방울 무늬 넥타이를 한 토머스 립턴
 영국이 식민지에서 진행한 차 사업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된 시기는 20c 초이다. 인도, 실론(현재 스리랑카), 아프리카에서 생산된 홍차가 중국을 제치고 서구세계에 빠르게 확산되었다. 차 무역을 주도했던 중국차는 점차 중심에서 밀려나고 식민지에서 생산된 홍차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중국은 아편전쟁이후 많은 전쟁을 치르게 되면서 국력이 쇠약해졌다. 서서히 문호를 개방하면서 상인들 간의 대립으로 귀중한 유물들은 전 세계로 흩어졌다. 어떤 이 들은 중국인들의 정신은 파괴되어 표절자와 노동자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중국이 몸살을 앓고 있을 때 영국은 세계의 차 시장을 점령하게 된다. 아삼에서 차 생산이 성공을 거두게 되자 실론지역에서도 아삼종이 재배된다. 영국정부의 지시로 제임스 테일러(1835~1892)는 아삼종을 재배(1876년)하게 된다. 그 후 아삼종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1877년), 말라위(1878년), 케냐(1903년), 우간다(1909년)지역 순으로 재배 된다. 그밖에 독일, 러시아인들도 다원(茶園)을 조성했다. 현재(2010년) 미국에서 유일하게 차가 재배되는 지역인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도 그때(1887년경) 형성된 다원이다. 1912년에 차 농사가 중단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생산되고 있다.

 이렇게 19c 말 유행한 차생산은 영국이 주도적이었으며 제임스 테일러는 실론에 정착한 뒤 홍차 재배와 제다도구를 제작하는데 몰두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사교보다는 홍차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고 한다. 무뚝뚝하고 까다로운 성격 탓이기도 했지만 그가 실론 섬에서 보낸 40년간의 홍차 연구는 영국의 홍차를 확고히 다지는 역할을 했다. 거기에 토머스 립턴의 홍차 광고는 세계인의 입맛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토머스 립턴(Thomas Johnstone Lipton, 1850~1931)은 열다섯에 8달러도 안되는 돈으로 미국을 여행 할 정도로 모험심과 배짱이 두둑했다. 그는 미국의 담배회사와 쌀 농장, 백화점의 식품관에서 일을 했다. 이곳에서 립턴은 미국식 상품화와 광고가 어떤 효과를 내는지 경험했고, 훗날 이때의 교훈을 광고에 적용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미국으로 갔으나 그는 21세에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 식료품점을 개업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광고를 한다. ‘나는 립턴 가게로 간다. 아일랜드 베이컨이 이 마을에서 제일 맛있기 때문이다’라고 적힌 피켓을 직접 들고 거리를 행진했다. 그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식료품점은 성공을 거뒀다. 1880년 무렵 가게 20곳, 1890년에는 300곳을 소유하게 된다. 영국 전역에서 그의 이름은 누구나 알게 됐다. 식품유통업에 성공한 그는 차 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1889년 2만상자의 차가 글래스고에 도착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브라스밴드와 백파이프를 동원해 퍼레이드를 했다. 당시 차 가격은 파운드당 약 3실링이었지만 립턴은 1실링 7펜스였다. 초기에는 ‘맛이 없어서 싼 것’이라는 시샘 섞인 비방도 있었다. 그는 홍차의 맛을 증명하기 위해 1891년 런던의 차 경매에 우바지역에서 만든 홍차를 출품한다. 최고의 가격에 낙찰된다. 그는 직접 실론에 가서 캔디와 우바 지역의 다원을 매입하여 17곳에서 차를 생산했다. 1892년에 내건 ‘다원에서 직접 티 포트로’라는 슬로건은 대표적인 광고 문안이 되었다. 그는 실론 섬 전체가 하나의 다원을 이루고 있음을 뽐내며, 실론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차밭을 소개하는 등 광고에 최대한 노력을 했다. 요트모자와 물방울무늬 나비넥타이 차림을 한 인자한 아버지 모습은 다원을 관리하는 자신으로 이미지화 했다. 그는 차 사업을 시작한지 10년 만에 백만장자 식료품상에서 억만장자 차 상인이 되었다. 립턴사는 매장운영과 차의 맛과 향을 보존하는데도 효율성을 보여줬다. 당시 주로 무게를 달아 팔았던 홍차를 포장해서 팔기 시작했다. 각 매장의 차를 런던의 티 테이스터들이 테이스팅 할 수 있도록 했으며 소비자들의 기호에 맞는 차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자선활동에도 참여해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따뜻한 홍차를 제공했다. 마차로 빈민가를 돌며 따뜻한 홍차를 제공했다. 이러한 활동을 인정받아 1898년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받게 된다. 이후 그는 ‘토머스 립턴경’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는 독신으로 살았으며 유산은 글래스고에 기부되어 병자와 빈민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되었다.

 / 글 = 이창숙 문화살림연구원 원장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