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19c 말 유행한 차생산은 영국이 주도적이었으며 제임스 테일러는 실론에 정착한 뒤 홍차 재배와 제다도구를 제작하는데 몰두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사교보다는 홍차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고 한다. 무뚝뚝하고 까다로운 성격 탓이기도 했지만 그가 실론 섬에서 보낸 40년간의 홍차 연구는 영국의 홍차를 확고히 다지는 역할을 했다. 거기에 토머스 립턴의 홍차 광고는 세계인의 입맛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토머스 립턴(Thomas Johnstone Lipton, 1850~1931)은 열다섯에 8달러도 안되는 돈으로 미국을 여행 할 정도로 모험심과 배짱이 두둑했다. 그는 미국의 담배회사와 쌀 농장, 백화점의 식품관에서 일을 했다. 이곳에서 립턴은 미국식 상품화와 광고가 어떤 효과를 내는지 경험했고, 훗날 이때의 교훈을 광고에 적용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미국으로 갔으나 그는 21세에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 식료품점을 개업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광고를 한다. ‘나는 립턴 가게로 간다. 아일랜드 베이컨이 이 마을에서 제일 맛있기 때문이다’라고 적힌 피켓을 직접 들고 거리를 행진했다. 그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식료품점은 성공을 거뒀다. 1880년 무렵 가게 20곳, 1890년에는 300곳을 소유하게 된다. 영국 전역에서 그의 이름은 누구나 알게 됐다. 식품유통업에 성공한 그는 차 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1889년 2만상자의 차가 글래스고에 도착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브라스밴드와 백파이프를 동원해 퍼레이드를 했다. 당시 차 가격은 파운드당 약 3실링이었지만 립턴은 1실링 7펜스였다. 초기에는 ‘맛이 없어서 싼 것’이라는 시샘 섞인 비방도 있었다. 그는 홍차의 맛을 증명하기 위해 1891년 런던의 차 경매에 우바지역에서 만든 홍차를 출품한다. 최고의 가격에 낙찰된다. 그는 직접 실론에 가서 캔디와 우바 지역의 다원을 매입하여 17곳에서 차를 생산했다. 1892년에 내건 ‘다원에서 직접 티 포트로’라는 슬로건은 대표적인 광고 문안이 되었다. 그는 실론 섬 전체가 하나의 다원을 이루고 있음을 뽐내며, 실론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차밭을 소개하는 등 광고에 최대한 노력을 했다. 요트모자와 물방울무늬 나비넥타이 차림을 한 인자한 아버지 모습은 다원을 관리하는 자신으로 이미지화 했다. 그는 차 사업을 시작한지 10년 만에 백만장자 식료품상에서 억만장자 차 상인이 되었다. 립턴사는 매장운영과 차의 맛과 향을 보존하는데도 효율성을 보여줬다. 당시 주로 무게를 달아 팔았던 홍차를 포장해서 팔기 시작했다. 각 매장의 차를 런던의 티 테이스터들이 테이스팅 할 수 있도록 했으며 소비자들의 기호에 맞는 차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자선활동에도 참여해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따뜻한 홍차를 제공했다. 마차로 빈민가를 돌며 따뜻한 홍차를 제공했다. 이러한 활동을 인정받아 1898년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받게 된다. 이후 그는 ‘토머스 립턴경’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는 독신으로 살았으며 유산은 글래스고에 기부되어 병자와 빈민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되었다.
/ 글 = 이창숙 문화살림연구원 원장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