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왕들의 도자기 사랑과 찻잔
유럽 왕들의 도자기 사랑과 찻잔
  • 이창숙
  • 승인 2017.11.26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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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18>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 궁전내부, 벽면이 도자기로 가득 차있다.
 17~18세기 유럽의 왕족과 귀족들은 공간을 황금과 멋진 도자기로 꾸미는 것을 즐겼다. 방안 가득 중국에서 가져온 수많은 도자기는 그들만의 자랑거리였다.

 독일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1세는 아내를 위해 도자기로 장식한 방을 따로 만들어 선물을 할 정도였다. 특히 작센의 왕 아우구스트 2세의 츠빙거 궁전 도자기 방은 유명하다. 그는 도자기 수집만큼 만드는 방법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기여를 한 왕이다. 중국과의 무역이 시작되기 전, 유럽의 자기(磁器)들은 끓는 물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다. 가마 온도를 1400℃까지 끌어 올리는 방법에 대해서도 몰랐다. 도토(陶土)가 중국과는 달랐지만 자기 만드는 기법을 잘 알지 못해 품질 좋은 자기 생산이 어려웠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중국산 차와 자기가 더욱 인기를 끌게 된다. 차 보급이 중산층까지 확대되면서 자기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다. 중국 무역에서 차와 자기는 고가품이었다. 특히 물에 젖으면 안 되는 차와 비단은 배의 가장자리에 실어야 했다. 이때 배의 중심을 잡기위해서는 화물 무게의 절반 정도가 되는 물건을 배 아랫부분에 적재해야 했다. 이때 전체 바닥짐의 4분의1 정도가 자기였다고 한다. 1700년대 영국은 2만 4000톤 정도의 자기를 수입했으며 다른 유럽국가도 많은 양의 자기를 수입했다. 유럽의 중산층은 최고급 중국 자기로 차와 식사를 즐겼다. 차에 대한 수요와 자기 수요가 맞물리게 되면서 도자기 붐이 일어난다. 이렇게 되자 유럽의 도공들은 중국 자기와 같은 품질의 자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어느 날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리라는 약제상의 견습공에게 행운이 주어진다. 그는 연금술사로부터 경화도료 56g을 선물로 받는다. 19세인 그는 그 가루를 자신이 만들었다고 자랑하며 떠벌린다. 그 소문은 독일의 모든 왕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아우구스트 2세는 그를 찾아가 드레스덴에서 도자기를 만들게 했다. 하지만 뵈트리의 사려 깊지 못한 행동으로 도료분말은 다 없어진다. 쾨니히슈타인 성에 갇힌 뵈트리는 도료 제조를 강요받는다. 할 수 없이 백작에게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설명한다. 자신은 연금술에 정통하지 못하며 연금술사의 조수로 있었다고 밝힌다. 백작은 그에게 중국자기와 같은 자기를 만드는 비법을 제안한다. 죄수 신세가 된 연구자 뵈트리는 수많은 실패 끝에 1703년 경질의 붉은 색 자기를 만들어낸다. 가마는 5일 낮과 밤 동안 계속 불을 지폈고 아우구스트 2세에게 첫 번째 생산품인 붉은 색 찻주전자를 선물한다. 그 후 시간이 흐른 뒤 뵈트리는 흰색 경질 자기를 탄생 시킨다. 신뢰를 회복한 뵈트리는 그간의 잘못을 용서 받고 유럽 최고의 자기공장 책임자로 임명된다. 이 공장은 드레스덴 인근의 마이센이라는 작은 마을에 세워졌다. 아우구스트 2세는 이 공장을 연금술에 나오는 신비로운 돌 만큼이나 가치 있게 여겼다. 1713년부터 자기생산이 본격화된다. 찻주전자와 찻잔의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였다. 홍차 도구들이 독일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1740년 자기제작의 비밀이 독일 바깥지역으로 새어나간다. 그 영향으로 영국에서도 마이센지역의 자기들을 모방하기도 한다. 1751년 영국 사업가 15명이 우스터 로얄 포슬린이라는 도자기 회사를 공동 설립한다. 영국 자기회사들은 독일에서 가져온 자기 제조법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더 좋은 자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도예가 조지아 스포드는 뼈가루를 사용하여 본차이나(bone china)를 만들게 된다. 본차이나는 경질자기보다 제조가 쉽고 이가 쉽게 나가지 않았으며 상아빛 흰색을 띄었다. 투명도가 높은 반짝이는 본차이나는 차 도구는 물론 식기로도 인기가 있었다. 주로 중산층에게 인기가 있었다. 이시기에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조사이어 웨지우드(Josiah Wedgwood, 1730~1795)는 소득이 적은 노동자들도 구입할 수 있는 유백색의 경질 자기를 만드는데 성공한다. 조지3세(1738~1820)의 아내 샬럿 왕비(1744~1818)는 1765년 웨지우드요업에 크림웨어 찻잔과 커피잔 세트를 주문한다. 그녀는 크림웨어에 ‘퀸즈웨어’라는 명칭을 내리고 여왕의 자기업체로 지정한다. 이후 웨지우드 제품은 명성을 얻게 된다. 1773년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의 주문을 받아 952점 그릇을 납품한다. 이 그릇에는 영국의 유서 깊은 고성, 아름다운 궁전, 전원의 풍경이 그려져 있다. 현재 러시아의 에르미타슈 미술관에 소장되어있다.

  / 글 = 이창숙 문화살림연구원 원장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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