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교 시인의 ‘맹자와 윤동주’
김응교 시인의 ‘맹자와 윤동주’
  • 정재근 기자
  • 승인 2017.11.23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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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도민일보 비전창조 제2기 CVO과정 <25강>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 전북도민일보 비전창조아카데미가 23일 본사 대회의실에서 실시된 가운데 강사로 초빙된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가 ‘맹자와 윤동주’라는 주제로 강의를 펼치고 있다. 김얼 기자
“우리 삶은 늘 새로워야 하니까요.”

김응교 시인이 23일 전북도민일보 6층 대강당에서 진행된 전북도민일보 비전창조 아카데미 CVO과정에서 25주차 강사로 나서 이같이 표현했다.

그는 윤동주의 ‘서시’는 ‘맹자’의 핵심사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며 윤동주 시는 호연지기와 같다고 말했다.

특히 시 감상을 통해 우리 삶은 늘 새로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맹자는 변두리에서 자란 반면 윤동주는 명동마을에서 태어났다.

중국의 고대 추나라에서, 공자 이후 100여년이 지난 기원전 372년경에 태어났던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라는 이름이 나오면, 흔히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말을 떠올리곤 한다. 중국 한(漢)나라 때 ‘열녀전(列女傳)’에 나오는 구절이다. 변두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단독자들이 큰 인물이 됩니다.

 무당의 아들이었던 공자는 끊임없이 스승을 찾아 걸었고, 스스로 스승이 된 이후에도 걷고 또 걸었다.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라는 조그만 성읍 국가에서 태어난 석가도 원시공동체의 추장처럼 구도(求道)의 여행을 했다. 로마 식민지 아래 압박받고 소외된 청년 예수는 제자들과 유랑하고 마지막에 떠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한다. 부활해서는 가장 가난한 변두리 갈릴리를 향해 걸었다. 이들은 모두 변두리를 걸었다.(김응교, ‘곁으로-시로 만나는 윤동주’, 새물결플러스, 2015, 14면)

 BC 372년에 태어나 BC 289년에 죽었던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시대였다. 힘있는 제후가 스스로 왕이라 칭하던 시대였습니다. 야만의 시대에 맹자는 인의(仁義)를 무시하면 안 된다고 역설했다.

 회령과 종성에 살던 학자 네 사람이 가족들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정착하면서 1899년 2월 18일에 명동마을은 형성되었다. 문병규 가족 40명, 김약연 가족 31명, 그의 스승인 남도천 가족 7명, 김하규 가족 63명, 합쳐서 141명이라는 대가족이었다. 이주한 이들은 먼저 머물 집을 세우고, 이어서 공부를 가르칠 서당을 세웠다.

 1년 뒤에 윤씨네 18명이 이사왔는데, 윤하현의 맏아들 윤영석이 김약연의 누이동생 김용과 결혼한다. 그 사이에서 1917년 12월 30일에 태어난 맏아들이 바로 윤동주다. 중요한 인물은 윤동주의 외삼촌인 ‘김약연’(金躍淵, 1868~1942, 향년 74세)이다. 윤동주는 열살 때까지 해환(海煥), 곧 바다해(海), 불꽃환(煥)이라고 불렸다. 만주라는 중국어 문화권에서 자란 윤동주는 당연히 한문에 능했다. 1915년에 발표된 중국 정부의 ‘교육법’에 따라 중국어는 반드시 가르쳐야 하는 정규과목이었다.

 윤동주가 어릴 적에 한학책을 읽었다는 흔적은 그의 글에서 볼 수 있다. 윤동주가 쓴 아주 짧은 시 중에 ‘개’라는 시가 있다.

 “눈 우에서 / 개가 / 꽃을 그리오”라는 3행의 소품이다. 이 시는 육필 시고에 실린 원고지 순서로 보면 1936년 12월경 창작된 소품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시는 “개가 달리니 매화꽃 떨어지고, 닭이 다니니 대나무잎 무성하다(狗走梅花落 鷄行竹葉成)”라는 글과 그 발상법이 비슷하다.

 윤동주가 선택했던 연희전문학교은 교육방침은 동양과 서양의 화충이었다.

 총독부에서 1938년부터 조선어 교과과정을 개설하지 못하게 하였지만, 연희전문에서는 1938년 11월에 학칙을 개정하여 문과에 조선어를 개설하고 입학시험에도 조선어를 출제했다. 성적표를 보더라도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문과 시절에 한문과 중국어 성적이 뛰어났다는 것을 볼 수 있다. 1학년 때 조선어 점수는 100점입니다. 윤동주가 연희전문에서 한글 능력을 키은 뒤, 윤동주 시의 절정이 4학년에 이르게 되는 배경을 우리는 성적표를 보고도 참조할 수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서시’는 ‘맹자’의 핵심사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가장 처음 생각할 수 있는 사상은 ‘호연지기’(浩然之氣)이다. ‘맹자’에서 공손추가 맹자에게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선생님은 40대부터 부동심(不動心)을 가지셨다 했는데 부동심이란 어떤 장점이 있는지요?”

 “말을 알아듣는 일, 지언(知言)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데 있죠.”

 “그럼 호연지기란 무슨 말인지요?”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워요. 호연지기란 지극히 크고 강한 것이니, 정직함으로써 잘 기르고 해침이 없으면 호연지기가 천지간에 꽉 차게 됩니다. 이 호연지기는 의리를 많이 축적해서 생겨나는 것이예요, 하루아침에 벼락처럼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예요. 그러니까 반드시 호연지기를 끊임없이 키울 수 있도록 착한 의를 쌓아야 하고, 그 효과를 미리 성급하게 기대해서는 안 돼요.”

 시(是)란 ‘그것’으로 바로 호연지기를 말한다. 호연지기란 집의(集義)라고 정의한다. 집의란 행동마다 의(義)를 실천하며 축적하는 삶을 말한다. 곧 선을 축적하는 적선(積善)이지요. 行有不慊於心(행유불겸어심)이면 則矣(칙뇌의)이다. 겸(慊)은 뜻이 많은 한자인데, 만족스러운이라는 뜻이다. ‘行有不慊於心’이란 자신이 했던 행동이 마음에 만족스럽지 않으면, 즉뇌의(則矣) 즉 스스로 목마른 상태가 된다는 말이다. 예수가 말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와 그대로 통하는 말이다. 윤동주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서시)”고 썼을 때 “나는 괴로워했다”라는 부분이 ‘즉뇌의’(則矣)의 상태이다. 끊임없이 일상 속에서 집의(集義) 적선(積善)을 하지 않는다면 호연지기를 느낄 리 만무하다.

 ‘서시’에 첫 구절 끝의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은 맹자의 양불괴어천(仰不傀於天)을 그대로 인용한 구절이다. 맹자‘진심(盡心)’장 군자삼락(君子三樂) 중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仰不愧於天) 사람을 굽어보아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다(二樂也)”라는 부분을 우리말로 번역한 표현이다.

 “신시(新詩)를 더욱 좋아하여”라는 구절을 볼 때, 윤동주가 살아온 교육환경에서는 중국 고전인 한시(漢詩)를 더 많이 읽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동양고전과 성경과 서양인문학을 함께 공부했던 윤동주의 탁월함은 다시 주목해야 할 덕목이다.

 윤동주가 연희전문에 입학하자마자 지었던 ‘새로운 길’을 읽으며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 삶은 늘 새로워야 하니까요.

 ◆김응교 시인 약력

 시집 『씨앗/통조림』, 평론집『처럼-시로 만나는 윤동주』, 『곁으로-문학의 공간』 『그늘-문학과 숨은 신』 『한일쿨투라』『한국시와 사회적 상상력』

 연세대 신학과, 연세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문학박사, 도쿄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공부하고 10년간 와세다대학 객원교수로 한국학을 강연했다.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로 있으며, CBS TV <크리스천 NOW> 진행자이며, 국민TV 인문학 방송<김응교의 일시적 순간>을 진행, KBS  자문위원으로 있었다. MBC TV <무한도전>, CBS TV 아카데미숲에서 강연했다.

 

정재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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