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 박정애
  • 승인 2017.11.23 15: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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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가져 오는 변화를 우리네는 따라가기 힘든 변화의 연속이다. 하지만 절대적인 것도 절대적 이어야 하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변하는 것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절대로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어줍지 않게 글을 쓰다 보니까 텔레비전에서 구사하는 말들을 따라가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되는 말들이 너무 많다.

물론 ‘거시기’라는 말이 고유명사로도 혹은 형용사의 역할까지를 사전에 등재돼 사용되고 있다. 요즘 유행어처럼 ‘너무’라는 단어가 정말 너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오랜만에 만나는 자기 부모님을 만나서 처음 하는 말마디에

“너무 보고 싶었어요!”

 부모란 아무리 많이 보고 싶어도 지나침이 있을 수 없는 말이다. 보통 텔레비전 화면의 말들이다.

‘너무’란 정해진 정도나 한계에 ‘지나치다’는 뜻의 매우 중요한 부사이다.

 부모님의 그리움이 지나칠 수 있을까? 연인의 사랑이 지나칠 수 있을까.

 너무 맛있어요, 너무 행복해요,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다 보면 ‘너무’ 라는 말의 홍수에 웬만한 긍정의 표현이 ‘너무’라는 어처구니없는 파생어에 휩쓸려 가는 것을, 꼭 텔레비전의 말만은 아니다.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어른 애 할 것 없이 그야말로 너무 많이 남발되어가고 있다. 그냥 사전을 고치면 되겠지만, ‘짜장면’이라는 음식의 고유명사를 어느 지방의 사람들이 발음하지 못하는 이유로 ‘자장면’이 되는 식의 사전 고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먹는 것만큼 중요 한 게 또 있을까? 그래서 누구나 쓰고 있는 ‘식사(食事)’라는 말, 우리가 읽은 옛말 중에는 식사라는 말은 없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이 나라의 민주화를 간절히 열망하시던 어느 목사님께서 저녁밥상에 마주 앉아 있는 필자에게 “이 사람아! 자네는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기억해두고 틈나는 대로 다른 이들에게 일러주게‘식사’란 우리말이 아닐세. 일제의 잔재일세. 우리 양민들에게 일을 시키면서 단 일분이라도 쉬는 시간을 주지 않으려고 <식사 개시, 식사끝>을 입에 달고 살았다네.

 밥을 먹을 때처럼 행복한 시간이 어디 있다고 일(事)자를~~~ ”

 하지만 그 말이 보편화 되어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식사 하세요! 식사해! 가 되어 있다. 어찌 보면 우리 고유의 어렵고 또는 복잡한 말들이 있을 수 있다.

 하루 세끼 다 다르게 붙여지는 끼니 이름들, 그렇지만 위에 열거한 말들이 그렇게 복잡하지도 어렵지도 않다. 적어도 대중 매체인 텔레비전이나 공적인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곳에서는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

 우리 고유의 악기로 우리의 흥을 돋우고 정월이면 일 년의 안녕과 무사태평을 기원하며 정월대보름이 오기 전 가가호호 풍악을 울리며 덩실 덩실 춤추며 모아진 제물로 정월대보름 삼사동네 함께 모여 풍년을 기원하며 즐기던 우리고유의 풍악이 언제 부터인가 농악이라는 이름으로 농민들만의 것인 것처럼 되었다. 잘못된 말이다 풍악이다

 별 다른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 인력 자원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 미래 세대들에게 가르치는 교과서마저 나라님 마음대로 고쳐지고 있는 시대, 그래서 우리는 구경꾼이 되어야 하는 가 말이다.

절대로 변해서는 않되 는 것은 있다. 더불어 살아간다고 했었다 언제부터인가 전부라 말할 수는 없지만 젊은 세대들 사이에 “우리”라는 말이 점점 생소한 말이 되어간다.

“나” 아니면 “너” 내가 존재하기 위해 너는 그저 있을 수밖에 없는 필요 불가한 것, 이겨야 되는 상대들이 이웃이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미래 정말 꼭 있어야 하는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어른들이 잘못 보여 지고 그렇게 가르쳐 그런 것, 아닐까?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박정애 / 시인, 전 문인협회 군산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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