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가르는 티 클리퍼선
바람을 가르는 티 클리퍼선
  • 이창숙
  • 승인 2017.11.12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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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17>
 영국이 차 무역을 독점하던 시절, 영국은 차를 수송하는데 걸리는 시간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중국차가 영국인들에게 전달되기까지 왕복 2년 이상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보관 상태에 따라 곰팡이가 피기도 하였다. 차를 만드는 기술도 정밀하지 않아 차 맛도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인기는 치솟고 있었다. 1834년 동인도회사의 중국 무역 독점권이 종료된 후, 무역이 자유화되면서 차를 운반하던 클리퍼선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미국의 ‘오리엔탈 호’는 중국에서 영국까지 차를 수송하는데 97일이 걸렸다. 신선한 차 맛을 본 매니아들이 열광하자 차 가격이 올라갔다. 가장 먼저 들어온 차는 매년 비싸게 팔렸다. 그해 가장 빨리 도착한 클리퍼선은 유명해졌으며 그 배가 실고 온 차를 마시고 싶어 했다. 유명해진 클리퍼의 명성과 이익금은 선원들에게 돌아갔으며 보너스도 주어졌다. 그만큼 선원들은 차를 신속하게 구입해서 배에 실고 중국을 떠났다. 차 중개상과 도매상들도 신선한 차를 구입하기 위해 배가 도착할 때 쯤 되면 인근호텔에서 밤을 보냈다. 일부는 선착장에서 노숙을 하면서 기다렸다. 차를 실은 한두 척의 클리퍼선이 템스강 입구에 있는 항구를 지나갔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직원들은 차를 시음할 준비를 했다. 오전 9시경에 모은 샘플로 시음회를 했다. 규모가 큰 상인들이 먼저 경매를 시작했으며 무게에 따라 세금을 납부하였다.

  이렇게 런던이 세계 차 무역의 중심 도시로 자리 잡으면서 매년 벌이는 클리퍼선의 레이스는 배를 제작하는데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자극을 받은 선박회사들은 쾌속선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은 시속 22~24㎞로 달리는 ‘티 클리퍼’라는 쾌속선을 만들었다. 상인들은 가장 빨리 도착하는 배에 상금을 걸었으며 차를 실은 범선이 바람과 함께 템스 강변에 나타났다. 신선한 차를 빨리 공급하기 위한 티 클리퍼선의 경주(競走)가 시작됐다. 1860년대에 들어서면서 경주가 더욱 치열해졌다. 템스 강가 선술집과 레스토랑에는 차를 마시면서 자신이 내기를 걸은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유명한 티 클리퍼의 이름을 붙인 ‘에리얼’, ‘태핑’과 같은 선술집도 있었다. 지구의 3/4 을 가로지르는 100일간의 경주는 매순간 치열했으며 소중했다. 배의 위치를 알리는 전보가 가장 가까운 우체국에 전달되면 런던 항 선착장의 클리퍼 소유주와 상인들은 나름대로 손익계산을 하며 논쟁을 벌였다. 1866년에는 40여척의 영국배가 경쟁을 벌였다. 852톤 규모의 에리얼 호는 규모면에서 가장 우세했지만 숙명의 라이벌 피어리크로스 호에게 매번 우승을 빼앗겼다. 1861년부터 1865년까지 매년 우승을 했으며 1864년 세리카호에게 하루 늦어 우승을 놓쳤다. 한번은 우승후보였던 에리얼 호가 선착장에 도착을 했지만 조수 때문에 정박이 어려워 20분 먼저 정박한 태핑 호가 우승을 하게 된다. 차를 담은 견본박스가 제일 먼저 선착장에 던져 진 티 클리퍼선이 최후의 승리자 되는 것이다.

  이렇게 긴장감을 주는 티 레이스는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막을 내린다. 좁은 수에즈 운하는 바람이 불지 않아 범선의 운항이 어려워 기선만 다닐 수 있었다. 1871년 클리퍼선의 경주는 마지막이 되었다. 최신형 클리퍼인 ‘커티삭(Cutty Sark)’은 1869년 만들어졌지만 한 번도 달려보지 못한 비운의 클리퍼선이 된다. 하지만 이 당시 유명했던 클리퍼선은 사라지고 현재 그리니치에는 커티 삭만 남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범선이 기선으로 대체되어 차 수송 시간이 단축되었어도 영국인들은 만든 지 오래된 중국차 수입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인도의 아삼지역에 차를 재배하기 위해 이전부터 노력했다. 그곳에는 야생 차나무가 있었지만 좋은 차를 만들기에는 부족한 것이 많았다. 영국은 중국에 스코틀랜드의 식물학자 로버트 포천을 파견한다. 그는 아편전쟁이 끝난 이듬해 위험을 감수하고 중국을 첫 방문한다. 결국 많은 양의 차 씨앗과 차나무, 다구, 경험이 풍부한 기술자와 함께 인도로 돌아왔다. 이렇게 영국인들은 좋은 차를 만들기 위해 계속 노력하였다.

 / 글 = 이창숙 문화살림연구원 원장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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