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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벅해 놓은 이야깃거리
이문수 전북도립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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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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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말, 선선한 가을바람과 청명한 하늘에 이끌려 모악산에 올랐다. 모악산 나무들은 봄을 준비하기 위해 이미 자신의 몸을 물들였고, 가볍게 덜어내고 있었다. 형형색색으로 등산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등산객들 사이에서 이방인처럼 평상복을 입고 홀로 산책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였다. 필자는 몸에서 땀 흘리는 운동을 즐기지 않는다. 운동보다는 진한 에스프레소를 마시면서 담소 나누는 것이 더 체질에 맞는다. 운동을 좋아하게 생겼는데 ‘운동을 좋아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미소를 머금고 농담 삼아 고종 얘기를 한다.

 조선의 국운이 기울었을 때 왕위에 오른 고종(高宗, 1852~1919). 그는 대한제국을 세우고 실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황제로서 조선왕조를 부흥시키려 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식민지화의 길을 걸었고 제국의 황제는 국권을 지켜내지 못한 인물로 남아야 했다. 최근에 와서 조선을 부흥시키려 했던 그의 노력을 재평가하기도 하지만, 망국의 책임이 그에게 있기에 역사적 평가는 인색하다.

 고종과 테니스에 대한 일화가 있는 영국대사관은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 이 정원은 처음부터 야외 연회장으로 유명했고, 상당 기간 이 땅의 모든 외교사절이 참석하는 파티가 자주 열렸다. 대사관저는 120여 년이 지났지만, 전통을 중시하는 영국의 공관답게 첫 모습대로 사용하는 유일한 외국 공관이다. 테니스 코트, 수영장, 술집까지 갖춰져 있다. 효율적 업무를 위해서는 재충전이 필요하다는 영국인의 생활방식에서다.

 그곳에서 테니스 하는 것을 처음 본 고종이 “그리 힘든 건 머슴에게나 시키지 뭐 하러 직접 하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 힘을 쓰면서 땀이 흐르는 일은 지체 높은 사람들이 하지 않았다. 힘이 몸 안에 들어오는 것을 ‘힘들다’고 하고, 몸 밖으로 나가는 것을 ‘힘이 난다’고 한다. 하지만 힘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내보내려면 먼저 들여야만 한다. 힘은 들일 때는 괴롭고 내보낼 때는 즐겁다. 선조들은 그것을 알았으나, 힘쓰는 일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일부러 힘을 들이려 하지는 않았다.

 다음으로 커피 이야기이다. 1896년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한 후,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는 동안 새로운 환경에 매우 빠르게 적응했다. 당시 그는 거의 궁궐에 감금된 상태에서 일본의 감시를 받고 있었고, 자신과 세자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태였기에 손탁을 통해서 모든 음식물을 외부에서 조달받았다. 이러한 정황을 이유로 고종이 아관파천 때 손탁에 의해 처음으로 커피를 접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고종이 아관파천 때 처음 커피를 접했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아관파천 이전에 이미 궁중에서 커피가 음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담은 문헌 기록이 있다. 1880년대 중반에 이미 궁중에서는 커피를 마셨다. 따라서 고종이 아관파천 때 처음 커피를 접했다고 보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또한, 아관파천 이전부터 고종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온 손탁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새삼 커피를 처음 소개했다는 것도 어설프다.

 한편으로, 정관헌이 고종의 커피숍이라는 이야기이다. 정관헌은 솔밭과 어우러진 함녕전 등 고건축물을 ‘고요하게(靜) 내다보는(觀) 곳’이라는 뜻이다. 현재까지는 정관헌에서 고종이 커피를 마시고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없다. 그곳은 고종이 커피 마시고, 음악을 즐겼다기보다는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시고 제례를 지낸 신성한 곳이었다. 여러모로 살펴보면, 세간에 회자하는 고종과 커피에 관한 말들은 사실 관계가 약하다. 폭압적인 열강들의 각축과 혼란한 국내 정치적 상황, 차가운 궁궐 속에서 무력하고 외로운 조선의 군주 고종. 고종의 커피숍은 매혹적인 향기 속에서 달콤하면서도 쓰디쓴 맛을 내는 커피와 고종 삶의 궤적을 교묘하게 범벅해 놓은 이야깃거리일 뿐이다.

 필자의 은사에 따르면, “한 권의 책을 읽은 자가 가장 위험하다”고 한다. 얄팍하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진리라고 믿고 끝까지 주장하는 것을 경계하는 가르침이다. 정보와 지식이 부족해서 모를 수는 있지만 속단하지 않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이문수<전북도립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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