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없는 학교, 학교 없는 미래
미래 없는 학교, 학교 없는 미래
  • 이혜숙
  • 승인 2017.10.24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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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가 국가와 사회의 미래를 걱정하던 시대가 있었고, 나는 그 언저리에서 그 걱정을 배태한 채 나의 어린 시절을 마무리했다. 초등 교사였던 어머니의 덕으로 학교를 삶의 한 영역으로까지 이해했던 내겐 더욱 학교의 울림이 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절을 건너온 우리가 국가와 사회가 학교를 걱정하는 시대를 맞이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7년 청소년 통계’에 따르면 2015년 9~24세 청소년의 고의적 자해(자살)로 인한 사망률은 인구 10만 명당 7.2명으로 사망원인 1위를 차지했다. 이 지표 하나로 현재의 학교가 처한 좌표를 설명하는데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이다.

 이 통계를 자살 성공률과 자살 시도율로 추산을 해보면, 하루에 최소 약 300명 이상의 아이들이 자살을 시도하고 있으며, 그 10배 이상의 아이들이 한 번쯤 자살을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에 도달할 수 있다.

 앨빈 토플러의 지적처럼, 산업혁명이 불러온 새로운 사회 구조에 필요한 노동력을 양성하고, 국가라는 공동체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한 제도로서의 공교육은 탄생되었고, 자본의 이해를 충족시키기 위해 ‘즉시 투입 가능한’ 산업사회의 유효 노동력을 만들어내는데 그 기능을 다해왔고, 국민들은 교육을 의무로 지고 살아오게 된 것이다.

 나를 위한 교육이 아니라 자본의 이해를 충족시키는 방식으로 교육이 존재하고, 그 목적에 충실하고자 경쟁을 도입하고, 성적을 존재의 가치와 등치시키며, 지식습득을 목표로 하는 교육이 버젓이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그 목표에서 벗어나는 아이들이 자살하는 아이들의 37.8%를 차지하는 것이다.

 토마스 프레이는 2030년이면 세계의 대학 중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견한다.

 우리가 아이들 죽음의 행렬을 멈추고 사라질 학교를 대비할 수 있는 ‘당장의 할 일’은 무엇인가? 나는 그 해답의 단초를 ‘들돌’에서 찾고자 한다.

 우리네 제법 큰 마을이면 어김없이 어귀에 둥구나무가 있고, 그 아래 둥근 들돌이 있게 마련이다. 이 들돌은 마을 청년들 힘자랑의 도구며, 품삯의 계량이었지만 더 중요한 건 애머슴들이 어른의 자격을 부여받는 실험 도구로의 쓰임이었다.

 열일곱 살의 정월대보름이면 치러지는 ‘어른 자격시험’을 통과하면 공식적인 마을일과 회의에 참여할 수 있고, 어른들의 품삯을 받을 수 있고, 자립의 기반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농사의 시작인 정월대보름은 성인식을 치르는 청년들의 고함으로 들떴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60여 년 전만 해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지금의 고등학교 1학년들은 어떠한가?

 청소년이라는 이름을 씌워 미성숙한 존재로 만들어두고,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부모들의 꿈을 이식받아 부모의 커리큘럼 안에서 성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들이 스스로 얻어야 할 실패와 성공의 과실도 따지 못한 채, 부모의 경험과 지식 속에서 실패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이 없는 아이들로 자라지는 않는가? 학교와 부모가 씌워놓은 경쟁의 굴레 속에서 다람쥐처럼 달리다가 경쟁에서 뒤처지는 순간 죽음을 떠올리는 것은 아닐까?

 아이들을 스스로 세워야 한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결과 맺고, 그 결과가 고통이든 희열이든 그들의 몫으로 남겨야 한다. 그랬을 때만이 겪었던 모든 과정이 살아있는 배움으로, 진정한 학습으로 남을 수 있다.

 열일곱의 까까머리 아이들이 마을의 주체로 설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일궈낸 성공과 좌절을 그 마을의 어른들이 지켜보고 감싸줬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걸 떠올려야 한다. 닭서리 수박서리를 하는 아이들의 치기를 어른들이 웃음으로 풀어냈기 때문에 그들은 어른으로 성장했고, 그들 아이들의 잘못을 감쌀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 또래가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 입과 눈보다 가슴이 더 먼저 반응하고, 언어보다 예술에 마음이 움직이고,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교육, 정치 나 법, 수학보다 철학과 문학이 더 가치를 부여받는 교육, 나는 이것이 사람됨의 교육이며, 미래교육이라고 생각하며, 이러한 교육만이 미래 없는 우리교육의 탈출구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아이들의 심장이 달아오를 때까지, 그들의 굵은 눈물이 마를 때까지, 그들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 미래교육을 시작하는 첫걸음은 스스로 시험대에서 내려올 아이들을 오롯하게 기다리는 일일 것이다. 들돌을 드는 아이를 바라보는 어른들처럼 말이다.

 이해숙<전라북도의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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