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돌아오는 ‘배려’
나에게 돌아오는 ‘배려’
  • 이동희
  • 승인 2017.10.18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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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에 읽은 이야기지만 쉽게 잊히지 않는다.

 서커스 구경을 간 한 가족이 있었다. 여러 아이들을 데리고 온 아빠는 매표소 앞에서 입장권을 사려고 지갑을 꺼냈는데, 정작 가지는 현금이 부족하여 어쩔 줄을 모른다. 아빠의 난감한 처지는 아랑곳없이 아이들은 서커스 구경에 대한 기대로 들떠 있었다. 마침 이런 상황을 바로 뒷자리에서 지켜보던 한 신사가 고액권의 지폐를 “방금 당신이 지갑을 꺼낼 때 떨어뜨린 것”이라며 건넨다. 현금이 부족했던 아빠는 매우 반갑지만, 난감함이나 고마움을 표할 사이도 없이, 아이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도 될 안도감이 충만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뜻밖의 도움을 받고 아이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었던 아빠가 아니다. 또한, 남몰래 선행을 베푼 다른 아빠도 아니다. 다만, 이런 상황전개를 고스란히 지켜봤던 신사의 어린 딸의 안목이다. 그 아이는 제 아빠가 지갑에서 고액권 지폐를 꺼냈으면서도 ‘주운 돈’이라며 건네는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리고 그 아이는 훌륭한 작가로 성장하여 자신이 겪었던 일화를 통해 ‘타인에 대한 배려’가 삶을 아름답게 만든다고 기록한다.

 안타깝게도 이 이야기의 공간적 배경은 미국이요, 이를 기록으로 남긴 작가는 미국인이다. 우리 사회도 많이 성숙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지만, 아직도 아쉬운 것은 바로 ‘남에 대한 배려’가 아닌가 한다.

 ‘재벌-갑질’이란 어휘가 한국발 신조어로 세계인들 사이에서 회자한다고 한다. ‘재계에서 큰 세력을 가진 자본가나 기업가의 무리’라는 뜻이 아니라, ‘온갖 탈법과 전횡으로 문어발식 자회사를 거느린 불법 기업’이란 의미로 ‘재벌’이 쓰인다는 것이다. ‘갑질’ 역시 세계인들 사이에서는 그 뜻을 찾을 수 없기에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자가 상대방에게 오만무례하게 행동하거나 이래라저래라 하며 제멋대로 구는 짓’이라는 뜻으로, 한국 사회를 조롱하는 투로 쓰인다니,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사업의 파트너로 배려하기보다는, 착취와 압박을 가해도 꼼짝 못하는 약자로 대하는 행태가 악순환하여 ‘중어(中魚)는 소어(小魚) 식(食)하고, 대어(大魚)는 중어(中魚) 식(食)한다’는, 우리나라에 만연한 약육강식의 못된 기업 풍토를 만들었을 것이다. 갑질 역시 마찬가지다. 갑질을 당한 을은 또 다른 갑이 되어 약자에게 횡포를 부리며, 갑질의 악순환을 되풀이한다. 이런 현상들이 쌓여 ‘앙갚음’의 악순환을 낳았을 것이다.

 야구경기 중계방송을 보노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 등장한다. 안타나 홈런을 친 선수가 자신의 방망이를 과격한 행동으로 던져버리는 소위 ‘빠던-야구방망이를 던져버리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에서 뛰는 외국출신 선수나, 역사나 규모면에서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야구의 본고장인 미국 메이저리그 선수들에게서는 그런 장면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운동 경기는 상대가 있는 놀이다. 오늘날 스포츠가 아무리 상업화된 장삿속이라지만, 그래도 상대를 배려하려는 일말의 ‘스포츠정신’을 유지하지 않고서는 존재 이유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안타나 홈런을 친 선수가 그 기쁨을, 안타나 홈런을 맞은 상대 선수를 자극하는 방법으로 표출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스포츠라면 그것은 전쟁이나 다름없는 것이 아닌가? 전쟁을 보려고 운동장에 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메이저리그에서는 그런 과격한 행위로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선수는 다음 타석에서 보복을 당하는 것이 불문율이 되었다 한다. ‘빠던’이 허용되는 한국 프로야구를 보노라면 역시 우리 사회에 ‘앙갚음’ 문화가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확인하는 일은 씁쓸하기만 하다.

 모든 예술혼의 핵심인 시 정신마저 궁극적으로는 타인에 대한 배려로부터 샘솟는다. <그때 그 무렵이었다…… 시가/ 날 찾아왔다. 난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겨울에선지 강에선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목소리는 아니었다, 말도,/ 침묵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거리에선가 날 부르고 있었다./ 밤의 가지들로부터 / 느닷없이 타인들 틈에서/ 격렬한 불길 속에서/ 혹은 내가 홀로 돌아올 때/ 얼굴도 없이 저만치 지키고 섰다가/ 나를 건드리곤 했다.-(파블로 네루다「시」전체2연 중1연)

 이동희<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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