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하여(1)
사랑에 대하여(1)
  • 최정호
  • 승인 2017.10.18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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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려진 아이가 아니라면 보통 어머니, 아버지의 성적 접촉으로 발생한 우리의 인생은 어머니의 품속에서 시작하고, 가끔은 아버지의 훈육 속에서 지속한다. 우리는 주어진 혜택에 대하여 당연시하기 때문에 부모님의 끝도 모를 희생적 양육노력을 감사히 여기는 것도 대부분 교육에 의해 시작된다. 그래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학습과 교육이 필요하다.

 나는 철이 들기 시작한 과거의 어느 때부터 부모님 특히 어머니의 헌신적 보살핌에 감사하면서도 그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했다. 그러한 궁금증은 불현듯 떠오르다 사라지곤 했는데 이 세상의 다른 어머니들이 비슷한 행동 패턴을 보이므로 또 관찰되는 자연의 짐승들도 다르지 않기에 이유는 잘 모르지만 <확정된 자연의 진리> 쯤으로 탐구의 대상에서 멀어져 갔다. 부모님의 사랑에 대한 정중한 의심도 안정된 사회체제 내에서는 관심의 바깥 영역에 방치되기 마련이다. 내가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수십 년이 지나고 내가 나의 자식을 가지고 난 후이다.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은 본능적이고 매우 난폭한 욕망의 형태로 부모에게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죽을 때까지 남자는 여자를 모르고, 남자도 여자를 모르듯이 내가 부모가 되고나서야 나의 부모님의 <무조건적 사랑>의 이유를 알게 되었으니, 그것은 어떤 미사여구로 포장되지 못할 생물학적 현상일 뿐이다. 개나 돼지 하물며 바퀴벌레 같은 곤충도 뜨거운 자식사랑이 관찰된다. 성적 접촉과 임신, 출산의 관계를 알아챈 인간에게 특이한 점은 부성애가 남다른 점이다. 학습과 전승을 통하여 문명을 일궈낸 인간세계의 수컷들은 욕망을 순치시켜야 했고, 양육기간이 길어진 자식에 대한 책임을 나눠야 하는 도덕을 감당해야 했다. 나는 학생과 인턴 수련 중, 응급실에서 어린아이들의 상처를 봉합할 때 공포와 무지에 기인한 아이들의 울음과 칭얼거림에 폭발할 것 같은 불편함을 참아왔다. 그런데 내 아이가 아내의 뱃속에 자라나자 어떤 수양이나 교양의 변화도 없이 아이들의 떼쓰기가 더 이상 귀에 거슬리지도 않아졌고 갑자기 자비로운 의사가 되었다.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아기로부터 나에게 발생한 것이다. 실로 기이한 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직업적 의무와 학습된 절제력으로 버티어 오던 불편함이 사라지고 자발적 친절함과 아이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이 어떠한 노력도 없이 찾아온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를 <사랑>이라고 표현하기를 좋아한다. 부모가 되면서 인간은 아가페적 사랑을 경험한다. 이는 이기적 인간이 이타적 인간이 될 수 있는 생물학적 세례이자 공동체 전체 사랑의 총량을 증가시키는 문명의 축복이다.

 아이가 태어날 때가 되면 아빠가 될 남자는 준비가 아직 덜된 자신을 발견한다. 아빠 노릇을 해 본 경험이 없어서 자신의 부모님처럼 아이를 헌신적으로 잘 돌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그러나 새끼를 키우는 자연세계의 짐승들처럼 인간 남자도 본능적으로 이미 충실한 돌보미를 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다. 그런데 태어난 아이들이 일방적으로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에게 기꺼이 모든 걸 희생할 각오를 생기게 할 뿐 아니라 그 긴 양육의 시간이 아쉬울 만큼 한없는 기쁨과 행복을 준다. 나는 “ 기억해라! 아이들이 주는 이러한 행복은 평생을 우리가 아이들에게 되갚아도 부족하다. 우리가 향후 이 아이들이 겪게 될 행복과 슬픔, 고통을 함께하게 되는 이유는 지금 받은 기쁨에 대한 대가이다”라며 아이의 엄마에게 말하곤 했다. 아이들이 커서 성인이 되어감에 따라 그 <무조건적 사랑>의 온도는 점점 식어간다. 아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감에 따라 부모는 아이에 대한 집착을 떼고 둥지를 떠나 세계로 날려 보낼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네가 내 아들로 태어나서 엄마는 얼마나 기쁜지 모른단다.”라며 나에게 용기를 주셨다. 그 말씀은 내 마음속에서 언제나 별처럼 빛나서 무너지지 않는 오뚝이처럼 절망에서 나를 일으켜 세운다. 나의 부모님은 나에게 늘 손님처럼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유전자의 반이 일치하지만, 나의 자식은 나에게 찾아온 귀한 손님이다. 그 손님은 한 번 방문으로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숨이 붙어 있는 날까지 나에게 머문다. 우리는 그 손님에게 너무나 과잉친절을 베풀고 싶어 한다. 과함이 부족함만 못하거늘, 부모는 유전자의 멍에를 벗어나지 못한다.

 최정호<최정호 성형외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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