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년 익산역에 쓰러진 문용기 열사(1878~1919)
기미년 익산역에 쓰러진 문용기 열사(1878~1919)
  • 기획취재팀
  • 승인 2017.10.18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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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항일운동가 魂 되살린다> 1부-항일운동가의 삶 (9)
“붉은 피로 여러분들이 대한의 신국민이 되게 하겠소.”

1919년 4월 4일, 솜리(전북 익산의 옛 지명) 장날 장꾼들 사이에 하얀 한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정오가 되자 솜리시장 네거리에 붉은 글씨로 ‘조선독립만세’라 쓴 깃발이 장대에 달려 높이 올라갔다. 보름 넘게 숨죽여 준비한 만세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독립 깃발 아래 문용기를 비롯한 김치옥, 박성엽, 최월봉, 박영문 등 남전교회 신도들과 도남학교 학생들, 그리고 신덕리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12시 30분경 흰 두루마기를 입은 문용기의 외침이다.

‘조선독립만세’라 쓴 현수막을 손에 든 문용기는 왜 만세운동을 해야 하는지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불길처럼 일어나고 있는 만세운동을 말하고 솜리 장날 만세운동이 시작되었음을 강한 어조와 불굴의 힘으로 선언했다. 이어 김치옥은 장날 군중에 배포했던 ‘조선독립선언서’를 읽기 시작했다. 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군중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문용기와 김치옥 등의 선창에 맞춰 하늘 높이 소리쳤다.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장터에 나왔던 사람들도 하나 둘 만세시위에 동참했다. 만세시위는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문용기는 만세시위를 일본군 본영이 있던 오하시농장으로 이끌었다. 호남평야의 대표적인 일본인 농장인 오하시농장은 수탈의 상징이자 식민지 권력을 대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헌병대는 소방대원 및 일본인 농장원까지 동원해 창검과 곤봉, 소방 갈구리 등을 휘두르면서 시위대를 해산하려 했다. 실탄사격까지 서슴치 않았다. 무자비한 진압에도 만세시위대의 기세는 꺽이지 않았다. 실탄사격에 시위군중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문용기는 태극기를 더 힘차게 흔들면서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선창했다. 이를 본 일본 헌병이 일본도를 빼어 태극기를 들고 있던 오른팔을 내리쳐 베어버렸다. 태극기를 잡은 손이 바닥에 떨어지자 문용기는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를 다시 집어 들어 만세를 외쳤다. 일본도의 칼날은 문용기의 왼팔마저 베었다. 양팔이 잘린 문용기는 다시 일어나 일본군을 쏘아 보면서 다시금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를 본 일본군들은 문용기의 온 몸을 찔렀다. 이에 굴하지 않고 문용기 열사는 사력을 다해 “여려분, 나는 이 붉은 피로 우리 대한의 신정부를 음조(陰助)하여, 여러분들이 대한의 신국민이 되게 하겠소”라고 힘겹게 외치고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부위렴 선교사는 ‘일본군이 칼과 갈고리 등으로 군중의 머리를 내리쳤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독립자금 조달에서 만세시위까지

#. 이승만과의 만남

문용기 열사는 1878년 5월 19일 익산군 서일면 관음리(현 오산면 오산리 310, 관음마을)에서 태어났다. 정관(正寬)으로도 불린 문용기는 한학을 배워 인근 마을에서 서당 훈장을 지냈다. 남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24살이란 늦은 나이에 군산영명학교 보통과에 입학했다. 문용기는 신학문을 배우는 소학교 학생이면서 한문 선생을 겸했다. 30세가 된 1908년에는 목포의 짠 왓킨스중학교(영흥학교로 개명)에 입학, 재학 중 이승만과 만나게 된다. 당시 YMCA 총무였던 이승만이 전국을 다니면서 강연활동을 하던 중 문용기와 만난 것이다. 세 살이 적었던 문용기는 이승만과 의기투합했고 독립에 대한 여망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바뀌었다.

#. 갑산에서 고향으로

1911년 학교를 졸업한 문용기는 두만강에 인접해 있는 함경도 갑산으로 향했다. 학교 추천으로 미국인이 운영하는 금광에 통역사로 취직한 것이다. 문용기는 일찍이 남전교회에서 전킨, 부위렴, 해리슨 목사 등을 만나면서 영어를 익히기 시작했다. 문용기는 8년간 통역사로 일하면서 모아둔 돈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사용하기로 하고 그의 제자들을 통해 만주와 상해의 독립운동가에게 보냈다.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자 문용기는 곧바로 귀향을 결심했다. 문용기는 고향에 내려오자마자 도남소학교에 임시교사가 되기를 자청했다. 그리고 어미니 김씨와 아내 최정자가 다니고 있던 남전교회를 중심으로 솜리만세운동을 기획했다.

#. 김치옥, 박성엽과 의기투합

문용기가 만세운동의 준비에 고민하고 있을 때 남전교회 신자 김치옥과 박성엽이 찾아왔다. 김치옥은 1897년생으로 1908년 해리슨 목사에게 세례를 받은 뒤 집사로 봉사하면서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김치옥은 구암교회를 다니고 있던 지인 임종우를 만났다. 임종우는 군산 3ㆍ1운동을 주동한 인물이다. 임종우로부터 익산에서도 만세운동이 있어야 한다는 권유를 받고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마침 군산 선교부에 근무하고 있던 박성엽을 만나 만세운동을 하기로 의기투합했다. 박성엽은 군산 만세시위 때 뿌려진 독립선언서를 보관하고 있었다.

#. 드디어 바로 그날이구나

문용기와 김치옥 등은 남전교회 장만준, 전창연 도남학교 교사 김연인 등을 만나 솜리만세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리와 익산군 일대의 교회(고현, 동련, 함라, 널문이, 여산, 웅포, 신등, 화화전교회)와 익산지역 천도교 측에도 연락했다. 남전교회 박다연, 정군덕, 김만수의 집에서 사흘간 태극기와 독립선언서가 만들어졌다. 4월 3일 밤, ‘내일 오전에 교회로 모일 것’, ‘복장은 흰색 한복차림으로 차려입을 것’ 등을 남전교회가 있는 남참마을, 북참마을, 영성마을 책임자에게 연락했다. 만세시위에 참여할 교인과 학생들은 밤을 뜬 눈으로 보냈다.

#. 죽음, 그 의미를 넘어

문용기와 도남학교 학생 박영문, 신덕리 장경춘, 춘포면 박도현, 이리 서정만, 황화면 이충규 등이 4ㆍ4 만세시위 중 순국했다. 거사 당일 아침 ‘나물 많이 캐 오세요’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들었던 문용기 열사의 아내 최정자는 남편의 시신을 찾아 수습해 고향 뒷산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그리고 열사가 입고 있던 하얀 한복을 혈흔이 낭자한 그 옷을 고이 접어 보관하다 해방이 되던 해 그 옷을 꺼내 놓고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1992년 문용기 열사의 옷은 자부 정귀례 여사에 의해 독립기념관에 기증되어 보관 전시 중이다.

지금 오하시 농장 앞에는 문용기 열사의 동상과 4ㆍ4만세운동 기념공원이 꾸며져 있다. 농장의 돌담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역사의 중층적 고민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역사를 만드는 건 죽은 자의 몫이지만 기억하는 건 산자의 몫이다.

기획취재팀
특별자문=홍성덕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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