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正義)에 대하여
정의 (正義)에 대하여
  • 최정호
  • 승인 2017.09.14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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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옳음을 뜻하는 두 글자를 합성해 만든 이 단어는 아마도 일본 사람이 만든 단어일 것이다. 우리가 쓰는 근대적 개념의 단어는 알고 보면 대부분 일본인들이 서양에서 쓰이는 단어를 중국의 고전이나 한자 자체에서 선택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서양의 개념을 한자를 이용하여 일본인의 시각으로 만들어진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숙명적 열패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문명은 물처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언어를 통하여 그 개념이 매개될 수밖에 없는 인간사회는 문명의 발생 이후 어느 곳에서나 언어의 수입과 수출은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의는 무엇인가? “사회가 정의로운지 묻는 것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이를테면,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 들을 어떻게 분배하는지 묻는 것이다.”라는 마이클 샌델의 언급은 정의가 분배의 문제임을 강조한 것이다. 나는 오늘 공정함으로서의 사회정의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나쁜 놈!”이라는 비난에 민감하다. “나쁜 놈”이라는 프레임은 화자(話者)의 독단적인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객관적인 사실인 양 들리기 때문에 다툼의 장에서 대단히 유용한 무기가 될 수 있다. 이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고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나쁜 놈이라는 평판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혹은 공정함은 모든 다양한 공동체 내에서 매우 중요한 작동 원리이다. 원숭이들도 부당한 대우에 매우 화를 내는 유명한 실험(과업에 대한 보상으로 오이와 포도로 부당한 보상을 함)에서도 확인 되듯이 종차(種差)에도 불구하고 생명체는 부당한 대우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한다. 이는 사회성 동물들에게는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의가 사회제도들의 가장 으뜸가는 덕목”이라는 롤스의 견해는 자유, 평등, 민주주의, 등등 바람직한 덕목들이 서로 충돌할 때 (우리는 곳곳에서 같은 사안에 대하여 상반된 주장을 보게 된다) ‘정의’를 상위 가치에 위계시키는 것이다. 자유와 평등은 따져보면 상충한다. 나의 자유는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부자와 빈자는 같은 자유를 누리는가? 이건희의 딸로 태어난 이부진은 돌아오는 추석 연휴에 스위스 몽블랑에 전용비행기를 타고 다녀올 자유를 누릴 수 있겠지만),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A양은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하기 때문에 그 연휴에 음식점 아르바이트를 쉴 자유도 없다. ~~을 할 자유가 있다고 그것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평등은 더 논란을 불러올 수 있는 개념이다. 극단적인 평등은 공산주의를 의미하지만, 소극적인 평등도 계급주의를 부추긴다는 비난에 직면할 수 있기에 진보적 인사들도 평등을 주장하기를 꺼린다. 반상의 신분제도는 조선조의 멸망으로 타파되었지만, 경제적 세습은 세계 어떤 나라에서도 혁파되지 못했고, 투표권의 평등이나 ‘법’ 앞에서의 평등이 형식적으로만 보장되고 있을 뿐이다. 자유와 평등은 정치사상이나 자신의 계급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누구나 끊임없이 체제를 비난할 수 있고 이를 해소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공정한 자유, 평등, 민주주의에는 그 내용에 이견이 있을 수 있어도 그 형식에는 나이와 성차, 계급과 정치적 다양성과 상관없이 기꺼이 동의한다. 그러나 어려움은 또 남는다.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가 다르기 때문이다. 정의를 다루는 철학자와 정치 사상가들의 의견도 평행선을 달린다.

 요즈음 문제가 되는 살충제 달걀을 낳는 닭에게 인간은 공정하게 대우했는가? 돼지에게는 정의롭게 대우하는가? 개고기를 먹지 못하도록 법제화하겠다는 사람들은 왜 특별히 개에게만 공정하게 대접하는가? 지금도 박근혜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특검과 헌법재판소는 공정했는가? 말은 쉽지만 공정함으로서의 정의(正義)도 절차적 과정에 대한 합의만 볼 수 있지 결과와 내용은 합의를 보기가 어렵다. 즉 정의는 어떤 진릿값으로 결정되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찾으면 되는 그 무엇이 아니다. 정의뿐 아니라 우리의 가치관이나 생각은 옳지도, 선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불확정적 개념임을 인정하는 것은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성 동물로써 공존과 공생을 위한 주춧돌이다.

 최정호<최정호 성형외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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