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벽골제에서 아리랑을 만나다
김제 벽골제에서 아리랑을 만나다
  • 임보경
  • 승인 2017.09.13 17: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코스모스 한들한들 춤추던 길 위에 자건거 행진은 참 싱그럽다. 멀리서 만경강의 후덕이 너른 벌판을 풍요롭고 든든하게 우리들 조상들의 마음에 자리잡았다. 하지만 그 후덕의 풍요와 든든함은 역사 속에서 아픔의 상처를 깊게 파고들게 했음도 알았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보이는 이곳 김제! 이곳을 찾을 때면 누구나 설렘을 갖는다. 부안의 동진강과 김제의 만경강이 어우러져 주는 혜택은 호남평야의 근원지로 전국에서 가장 쌀이 많이 나는 곡창지대라는 일순위의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반면에 조선시대 임진왜란때도 일본의 수탈지의 대상이 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도 이곳은 침탈의 장소였다는 것은 그들에게도 우리에게도 분명 생명수와 같은 곳이었다고 본다.

 저 앞에 쌍룡의 조형물이 우리를 맞는다. 김제벽골제는 삼한시대부터 수리시설이 마련되어 백제시대에 가서 좀더 저수지의 기능을 갖춰갔다. 전국을 대표하는 평야지대가 있다는 것은 수리시설이 그만큼 잘 마련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왜 김제 벽골제의 대표 상징물인 쌍룡이 저리 서로 맞대고 한치의 양보도 없이 무언가를 지키는가를 전설 속에서 찾아본다. 슬픈 전설이 깃든 단야루에서 쌍룡에게 물었다. 사나운 발톱을 세우며 활기 넘치는 꼬리의 굴곡과 곧 평야를 다 집어삼킬 듯한 모습은 무엇을 지키기 위함이냐고 말이다. 마음씨 착한 백룡과 심술보인 청룡은 이렇게 무언가를 두고 싸우게 된다. 결국 청룡이 이기게 되자 청룡은 벽골제를 파괴하려고 하여 김제 태수의 딸인 단야가 제물로 바쳐지게 되면서 벽골제를 지킬 수 있었다, 슬픈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벽골제의 보존에 나름 사명 의식을 느껴 보았다.

 그녀의 넋을 기리기 위해 단야루는 저렇게 벽골제를 응시하며 해마다 지평선 축제를 치루며 쌍룡놀이로 우리는 그녀에 대한 예를 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제의 평야가 주는 헤아릴 수 없는 혜택에 분명히 벽골제의 역할은 당당하게 당연했음을 생각해 본다.

 보아도 보아도 넓다. 그리고 꽉 찬다. 그래서 노래가 절로 나온다. 올해도 황금 물결의 행진이라고 외친다. 그 외침 속에 벽돌색의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2003년 5월 16일 전북 김제시 부량면 용성리 김제 벽골제 박물관에 총 면적 4만2천 249㎡에 자리한 ‘조정래의 아리랑 문학관’ 이다. 단야도 쌍룡도 조정래 작가의 혼신에 아리랑을 불러보았으리라 본다.

 아리랑의 작품의 발원지인 김제 만경평야는 일제 수탈과 착취와 수탈 그리고 민족의 애환과 친일파들의 적나라한 행동 등을 고발하며 민초들의 고초와 독립에 대한 열망을 1만 8천여장에 담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분의 집필 과정을 살펴보면서 경이롭고 뭉클한 감동이 일렁임을 느끼리라 본다. 대작을 남긴 것도 훌륭하지만, 우리의 역사를 대하소설에 사실적인 역사의 흔적을 자연스럽게 표현했다는 것은 우리 역사학자들이 시대마다 어려움에 처한 언론의 억압에 따른 한탄을 대신 작품으로 표현해주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메시지를 주었다고 본다. 분명히 사명의식이라고 본다. 만경강의 후덕 속에 김제 벽골제의 온전한 지킴이 과정에서 황금벌판으로 채워지게 했던 것은 이곳에 사는 백성 아니 한반도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머나먼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지켜온 그분들의 희생에 대한 역사 바로 알리고 알아가기 위한 조정래 작가의 책임의식이었다고 본다. 일제 시대하에 고향을 버리고 대의를 위해 떠나야 했던 그들의 새로운 삶의 터전인 하와이, 동경, 만주, 블라디보스톡 등지에서 40여년의 세월을 살아가는 그분들의 인물 묘사에서 역사의식을 불러 일으키고 우리 민족의 저항과 투쟁, 그리고 민족의 긍지와 자존심을 일개우는데 현장을 찾아 그분들의 숨결을 직접 체험한 아리랑은 우리에게 좀 더 큰 역할로 다가왔다.

 풍금을 울리던 어린시절의 아리랑도 일제의 갖은 수탈에도 참고 버텨내야만 했던 민족들의 가슴에도 아리랑은 한결같았고 김연아의 피겨스케이팅의 아리랑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가슴에도 아리랑은 같은 의미, 같은 아련함, 같은 동포애, 같은 민족의식으로 불렸으리라 본다.

 문학관 앞뜰을 내다보니 효녀가수 현숙의 효열비의 넉넉함도 보았다.

 그 옆에는 완도 청해진 유민 벽골군 이주 기념탑이 자리하고 있었다.

 통일신라 바다의 왕자라고 불리던 장보고는 해상무역과 군사기지국을 설치하여 당나라와 일본 삼국의 주요 무역권을 차지하면서 왕권을 능가할 정도의 부를 축적하자 이를 견제한 조정에서 보낸 염장에 의해 살해된 후 청해진의 이권은 그 무리에게 넘어갔지만 결국은 청해진은 해체되고 그곳에 사는 백성 10만명을 이곳 김제 벽골군으로 강제 이주시켜 벽골제 보수공사, 동진강 유역 간척과 방수공사 등에 이용되었다고 한다. 이주민까지 품어주었던 김제는 이렇게 넉넉함을 내어준 것으로 본다.

 김제 벽골제에서 만난 이모저모중 아리랑문학관의 만남은 가을의 선선함의 발길이 멈추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국가가 없는 상황에서 애국가가 있었지만 부를 수 없었던 상황 속에서 대중가요처럼 부를 수 있었던 것이 아리랑이었다. 그 시대의 정신위안부 여성도 하와이나 연해주 만주, 그리고 강제 이주당한 중앙아시아에서도 그들의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유전자속에 민족의 동질성의 힘으로 우리 후손에게 역사의식을 바로 서게 하였음을 인식하여야 한다.

 임보경<역사문화원 대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