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것은 멈추기를 거부한다
흐르는 것은 멈추기를 거부한다
  • 이문수
  • 승인 2017.08.20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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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들과 헛소리 늘어놓기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중고등학교 시절, “여성 상위시대가 뭔 줄 아냐?”, “몰라”, “여자가 상 위에서 남자와 밥을 같이 먹는 시대여”, “하하하, 그렇구나!”라고 허탈하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어릴 적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필자만 따로 차린 상에서 밥을 먹었기 때문에 헛헛한 웃음 속에는 뭔지 모를 무거움이 녹아 있었다.

 우리 집에는 어머니와 누나들은 할아버지와 겸상하지 못했다. 할머니도 남자들의 밥상에 수저를 얹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의 하늘을 찌르는 마초적인 권위 속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곰방대를 두드리면서 아랫사람을 부르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큰 교자상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서 밥을 같이 먹는 ‘여성 상위시대’가 왔다. 최소한 우리 집에서는 근대가 생산해 낸 가부장적인 가족 풍경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09년 3월 8일, 로마교황청은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20세기 여성해방운동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세탁기’라고 보도했다. ‘세탁기와 여성해방 : 세제를 넣은 후문을 닫고 취하는 휴식’이란 제목으로 세탁기의 공로를 치하해야 한다고 했다. 세탁기가 육체적인 여성의 가사노동을 덜어 주고, 남는 시간을 자신을 위해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여성 권익 신장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수자 경제학자인 장하준 교수도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꾼 발명품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1969년에 금성사가 세탁기를 처음 생산했다. 하지만 세탁과 헹굼, 배수와 급수를 할 때마다 사람이 수동으로 조작해야 해서 불편했고 가격도 비싸서 보급률이 저조했다. 1970년대에 대량 생산으로 가격이 내리고, 1980년대에는 거의 모든 가정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은 여성이 대세다. 아직도 사회 구석구석에는 양성이 평등하다고 단언하기에 부족한 구조들이 여전하지만, 남성이 체감하는 여성의 힘은 강력하다. 소비의 주체가 여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식당, 커피숍, 영화관, 미술관, 백화점 등 어디든지 여성이 많다. 미술판에도 여성이 많다. 미술대학에 강의를 가보면 70~80%가 여학생이다. 물리적인 숫자만 많은 게 아니라 내뿜는 열정과 기세도 압도적이다.

 이런 시류를 고려해서 전북도립미술관은 끓는 물처럼 솥뚜껑을 박차고 솟구치는 여성미술을 한 자리에 모았다. 폭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아시아의 문화적인 상황 속에서 거침없는 방식으로 표현한 여성미술에 주목했다. 더러는 아프고, 불안하고, 어둡고, 우울하고, 슬픈 상처를 용감하게 드러내고 있다. 여성들의 민낯을 과감한 예술적 언어로 고발하기도 한다.

 오는 9월 1일, <아시아현대미술전 2017>을 개최한다. 아시아권 10개국에서 24명이 참여했다. 요동하며 솟구치는 아시아 여성미술을 불러들인 것이다. 정치적 혼란과 개인의 정체성이 복잡하게 얽힌 아시아에서 저마다 처한 환경이 다르지만, 현실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면하면서 변화를 갈망하고 자기실현의 욕구를 거침없이 표현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2015년에는 아시아의 과거, 현재, 미래의 문제들을 제시했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아시아의 문화적인 상황을 폭넓게 펼치고 규명함으로써 아시아 현대미술의 미학적 특질을 제대로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6년 “ASIA YOUNG 36”은 아시아 청년미술가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려주면서, 탈 서구적인 시각에서 아시아 현대미술의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국제전이었다. 더불어 지역 미술 활성화와 국공립미술관의 특성화 전략의 하나로도 세간의 시선을 끌었다.

 전북도립미술관은 아시아 미술을 전북에 불러들이고, 전북미술을 아시아로 나가게 하는 프로젝트를 펼치고 있다. 아시아현대미술전과 창작스튜디오를 통해 전북미술가를 아시아권에 파견하고, 아시아권 미술가를 전북에 불러들여서 교류하면서 지평을 넓혀갈 것이다. 확실한 것은, 흐르는 것은 멈추기를 거부한다.

 이문수<전북도립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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