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운전사
택시 운전사
  • 이형구
  • 승인 2017.08.16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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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납부해야 할 사납금을 벌고 나서야 세상이 제대로 보인다고 하였다. 그 사납금을 채우지 못하면 밥을 굶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 밤중에는 총알택시라고 하여 논스톱으로 평상시 보다 반 토막의 시간 내에 역전이나 터미널에 도착하는 생명 담보의 택시도 그 시절에는 비일비재하였다. 그래도 머언 시골길 갔다 돌아올 때에는 신작로에 대책 없이 서서 시간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서슴없이 태우고 돌아오는 따뜻한 온정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예 회사에서 절대 금지사항 중의 하나라고 한다. 도와주고 험한 꼴을 본다고 하니 인심은 뒤로 가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군부정권 시절 저녁 9시 땡전 뉴스가 내일이면 밝혀질 황당한 사실을 진실이라고 으름장을 놓던 그 때나 AI의 인공지능이 인간지능을 능가하는 오늘날 바로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진실을 두고 허우적거리는 모습들은 말초신경을 자극하여 침묵의 혈기가 금방이라도 뇌관을 터뜨릴 것만 같은 분노를 머금케 하니 예나 지금이나 진실의 가시밭길은 별반 차이가 없는 듯 하다.

 6년 전인가 모악당에서 ‘짬봉’이란 연극을 본 일이 있다. 대사 중에 ‘비오는 날 뿌연 먼지가 나도록 얻어 맞으며 붉은 피로 대한민국을 불렀다’ 라며 80년의 5월을 전하고자 하였지만 그러나 그 연극도 우리가 알고자 하는 진실을 채워주지는 못하였다. 그 져 울분만 되새길 뿐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74년 12월일게다. 대전 발 영시 오십분 군용열차를 타고 공군 제1전투비행단이 있는 전남 광산군 송정리역에 도착하니 매서운 겨울의 여명이 밝아왔고 밤새 그렇게도 많은 하얀눈이 자대 배치 첫날을 환영하고 있었다. 저녁 9시 점호시간에 속칭 선배 기수별로 내리치는 엉덩이 타작이 지금도 꿈속에서 가끔씩 재연하면 진한 땀으로 속옷을 젖게 하기도 한 매 타작은 이제 막 배치 받아온 신병인 나와 함께온 제주도 친구는 실컷 얻어 맞고나서야 매 타작이 끝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내리쳐야할 후배가 없기 때문이다. 배급받는 군용 면 팬티가 엉덩이와 한 살이 되어서도 그렇게 신나게 맞아야 그날 밤이 꿀잠이었다. 이런 점호 행사가 없으면 어느 시간에 기상하여 얻어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단잠을 잘 수 가없었던 병영생활이다.

 당시는 주말이면 광주시내로 외출을 나갔고 자주 가는 곳이 이 비행장에서 가까운 양동시장이다. 볼거리도 많고 푸짐한 먹거리가 있어 군발이에게 딱이다. 시장통이어서인지 골목마다 나이와 무관하게 리어카꾼들과 장돌뱅이들이 큰 시장통 유동인구에 한 목을 차지하고 있었다. 저들도 이 시장통이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희망의 일터였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들의 무리들은 양동시장을 기억하는데 빼어 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절박한 상황이 벌어지는 스크린 한 장면에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녹색택시가 마지막으로 택한 산모퉁이 길목에서 만남 사람. 화면에 스친 그의 군복에 표시된 계급장이 육군중사였다. 그 군인은 택시 트렁크에 숨겨진 서울택시 번호판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우려하는 부하를 향해 보내라고 한다. 길목을 지키는 장병들은 장전된 소총을 앞에 들고 사격의 명령을 기다리는 자들이다. 택시 기사인 송광호(만섭 역)목도 독일기자 위르겐 한츠페터의 목도 계엄군 육군중사의 검지손가락에 달려 있는 순간이다. 군대의 부사관 계급에서 중사는 내가 겪어본 바로는 군생활에 제일 충성스런 군인 중의 군인이다. 특히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군인이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정력을 쏟아내는 젊은 샐러리맨과 같은 힘을 발휘하는 육군중사가 내린 판단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일까? 군율을 위반한 그를 국민들은 감사함을 뜨거운 가슴으로 전하고 싶은 오늘 그는 진정 군인정신에 투철한 군인이며 그나마 광주 망월동에 묻힌 5.18 영령들의 한을 풀어주는 작은 영웅이 아닌가 싶다.

  아직도 우리는 1980년 5월18일에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알아야 할 내용들이 너무도 많다. 1979년 5월 어느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라고 여기 저기서 거대한 용트림을 하고 있을 때 나는 그들을 저만치 두고 책가방 하나 들고 광주를 떠났고그렇게 득실거리며 양동시장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던 친구들은 1년 뒤인 80년 5월 어느날 한명도 남기지 않고 흔적도 없이 청소가 되어버렸다는 끔찍한 사실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구천을 헤매고 있을 그들의 넋을 위하여 당신은 한 번이라도 기도 해보았는가?

 가깝게 느껴진 진실을 역어낸 장훈 감독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이형구<(사)한국미래문화연구원장·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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