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 뒤돌아볼 새 없이 앞으로 매진하였다. 강력한 국가의 전통이 있었고, 엘리트들이 국가에 집중하면서 유교적 전통에 따른 나름대로 백성을 위한 통치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대체로 국가의 전략과 동원에 동의하고 따랐다. 또한 강력한 국가가 국가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비국민으로 만들거나 폭력을 행사하여 왔기 때문에 대체로 국가를 중심으로 한 경제성장의 돌진이 가능했었다.
그러나 그동안 여러 가지 위기들이 축적되어 왔다. 서구를 어느 정도 따라 잡은 상황에서 국가가 미래에 대한 좌표를 상실하여 국가가 국민의 동의를 얻는 게 매우 어렵게 되었다. 박근혜 정부는 퇴행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서 그러한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촛불혁명을 통하여 이러한 퇴행적 위기를 일부 해소하였지만 지금도 동아시아의 압축위기는 계속 축적되고 있다. 서구만 모방해오느라 현단계의 우리가 처한 문제가 무엇이며 해결방향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상상하고 논의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특히 학자들이 선도적으로 이러한 논의와 좌표설정을 해야 하지만 그동안 서구학문과 이론을 모방하는 데 집중하여 동아시아의 상황에 대한 제대로 된 진단도 하지 못하고 동아시아의 미래에 대한 좌표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위기가 되는 것은 동아시아가 처한 상황이 서구와 크게 다르지만 이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는 서구처럼 장기간에 걸쳐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미래로 헤쳐나온 것이 아니라 서구의 것을 이식하고 번역하여 현대를 만들어왔다. 압축적으로 번역된 서구, 굴절된 전통, 파편화된 공동체, 비대해진 국가, 조급함 등이 사회적 상상과 논의와 합의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 결과 동아시아 국가들이 모두 정신적 혼란상태에 있다. 국가도 개인도 좌표를 잃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국가를 성취해야 하는지, 어떤 미래로 가야하는지를 헤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사회적 아노미, 갈등, 불안이 계속 쌓여 가고 있다. 이제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는지를 동의를 이끌어내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공동체가 와해되어 복구하기도 힘들고, 국민들 묶어주는 상상도 어렵게 되어 각자 외로워하고 혼란스러워 한다. 동아시아 국가들도 협력체제를 구축하지 못하고 서로 다른 길에서 갈등하며 헤매고 있다.
더 멀리 더 종합적으로 더 근본적인 문제들을 상상해야할 동아시아의 학자들의 상상력이 서구에 종속되면서 동아시아를 제대로 진단하지도 못하고 좌표와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도 못해서 이러한 위기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제 서구를 넘어서 동아시아적 고민과 상상력이 필요할 때다.
이정덕 전북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