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책임과 실천: 심재좌망(心齎坐忘)
정치의 책임과 실천: 심재좌망(心齎坐忘)
  • 정항석
  • 승인 2017.07.23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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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기 위해 자기의 신체마저 잊어버릴 만큼 마음을 비우는 것을 이른다. <장자(莊子) 내편(內編)>의 <인간세편(人間世篇)>에 나오는 말이다. 속세에 있으면서 이를 행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언행의 명분과 지식에 의존하곤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장자(張子 B.C.369년?-B.C. 286)는 함부로 ‘명분과 지식을 내세우면 위험하다’고 이른다. 동시에 내적 의지 못지않게 외적 환경이 중요하다.

 왜 그럴까?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사회적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지혜와 슬기를 주는 철학은 많다. 해석학적 관점에서 보면 더러 겉으로만 볼 수 없는 다른 측면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데 심재좌망 역시 그렇다. 어쩌면 길게 혹은 짧게 삶을 살아도 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속세적 경향을 저버리기는 어렵다. 더욱이, 대략이라도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아두지 못하면 ‘세상치(世上癡)’가 되기 십상이다. 세속의 혼탁함에 섞이지 않겠다는 것이지만 인간이 가지면서 버리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는 권력욕이다. 근접하기 어려우면 아예 포기하지만 일말의 빛이라도 보이면 집착적 증세를 보이게 된다.

 권력과 부는 세속에서 차지하고 싶은 것 중의 으뜸으로 친다. 하지만 많지 않다는 것이 흠이다. 흔하다면 차지하는 것 자체가 유용하지만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많지 않은 것을 찾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몰리게 되는 것을 뜻하고 이 때문에 그들 사이에 갈등이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2천여 년 전에도 그러했는가 보다. 유가(儒家)에서는 주로 위정자(ruling class)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일러주는 것에 비하여 장자의 ‘가라사대’는 일반인(peoples)들을 포함하여 그들까지의 처세에 관한 것을 담고 있다. 그러한 장자가 공자(孔子)와 안회(顔回)를 내세워 무언가를 말하고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약태왕이형이(若殆往而刑耳). ‘권력에 가까이 근접해 보아야 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까닭을 일러준다. 부도불욕잡(夫道不欲雜). ‘무릇 도는 잡되지 않아야 한다. 잡되면 할 일이 많아지고, 일이 많아지면 여러 가지로 복잡해지며, 복잡하면 어지러운 근심에 쌓이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憂而不救(우이불구), 즉 ‘근심이 생기면 남을 구원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네 일도 못하게 되면서 다른 이를 위해 일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이다(所存於己者未定). 말하자면 속된 말로 ‘당신이나 잘 하세요’이다. ‘장자 가라사대’의 핵심은 ‘권력 주변에 얼쩡거리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원인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다. 명예의 추구와 지식의 추구는 다른 이들을 누르고 이기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자칫, ‘어렵게 쌓은 덕은 명예욕에 의해 허물어지기 십상이고 지식은 경쟁심을 유발시킨다(德蕩乎名知出乎爭)’고 하였다. 명예욕은 인간관계를 해치고 지식은 다툼의 도구이기 때문이다(知者爭器).

 그리고 장자의 ‘가라사대’는 더 가파르다. 이 두 가지는 흉기(凶器)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거세게 몰아붙인다. 첫째, 피차(彼此)가 덕이 두텁고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더라고 상대방의 마음가짐을 알기 어렵다. 짐작과 추측에서 오는 ‘그러했을 것이다’하는 것으로 상대를 판단하거나 또는 자신이 공적으로 하는 일에 대하여 ‘의로운 감정’으로 다가가게 되면 다른 이에게 면박을 주게 될 수 있는 탓이다(名聞不爭未達人心). 인의니, 행위준칙이니 하는 말을 못 알아듣거나 외면하는 이에게 늘어놓은 것은 자신을 돋보이게 할 뿐 다른 이의 결점을 들어내게 하는 무안을 주는 것과 같다. 하여, 명예에 관하여 다투어서는 아니 된다고 이른다. 이른즉, 함부로 인(仁)과 의(義)를 내세우는 것은 처세의 오류가 된다.

 둘째, 인과 의를 내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다.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정확히 이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얼추 이에 대해서는 누구나 들었을 것이다.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으면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알고는 있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이런 말을 내켜하지 않는다. 인과 의를 들어야 하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말이지만 좋게 수용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그러한 준비가 되지 않는 사람에게 인의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언급한다면 어떤 구실을 찾아서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힘(영향력)을 악용하려고 할 것이다.

 셋째, 둘째로 인한 마음의 변화이다. 좋은 소리를 못 들으면 낯빛은 변하기 마련이다. 심리적으로 흔들리고 애초의 심지는 변하게 된다. 같이하거나 혹은 보필하고자 하는 이를 인의의 방향으로 안내하겠다는 초심은 사라질 수 있다. 하여 자칫 마음에도 없는 말로써 아첨하여 늘어놓게 되고 태도는 비굴해 질 수 있다. 다른 유혹도 곁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인의와 다른 곳으로 끌려가게 될 수 있다. 듣기 좋은 말이 좋은 것 그리고 옳은 것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비위를 맞추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비유하여 ‘불로써 불을 끄게 되고, 물로써 물을 막으려는 것이라고 비아냥거린다(以火救火以水救水).

 이와 같은 장자의 가라사대는 공자의 사회적 야심에 대한 무위적 (無爲的) 사상을 주는 것이지만 그 한계는 사람들의 마음에 의존하고 있다는 데 있다. 기계적 언행이 주는 삭막함도 있을 수 있지만 자연과 더불어 마음을 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가능할까? 애시당초 출세가 목적이고 인의와 같은 ‘의로움’을 그 출세의 무기로 앞세우는 것이 화근이 되어 처음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또한, 인의와 같은 명분을 세워서 할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을 이루지 못할 경우 아예 인의의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딜레마는 이것이다. 인의를 들어야 할 상대방이 그럴 준비가 되지 못한 것을 탓할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시스템이 갖추지 않으면 늘 그것을 받아들일 큰 그릇을 찾아야 하는 소위, 인물론(人物論)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도자는 누구나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될 수 없다. 하지만 언제나 큰 그릇의 인물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민이다. 심재좌망. 개인적으로는 몰라도 세속에서 그리고 공적 차원에서는 어려운 일이다. 할 수 있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누가 ‘그 자리’에 위치한다 하더라도 그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 시스템도 고려해야 한다.

 정항석 (캠브리지대 연구학자, 전 대통령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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