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활동 역사서 염재야록 편찬한 염재 조희제(1873.12.10~1939.1.9)
항일활동 역사서 염재야록 편찬한 염재 조희제(1873.12.10~1939.1.9)
  • 한성천 기자
  • 승인 2017.07.06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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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항일운동가의 삶 ③

 “나라가 망한 날에 이르러 절개와 의리를 지킨 행적이 가장 왕성하게 펼쳐진 지역으로는 호남을 으뜸으로 칭하며, 기호 지방과 영남 지방이 그 다음이다. 그렇다면, 호남지역은 또한 어찌하여 이처럼 선비가 많은가? 우리 역대 임금님들께서 500년 동안 예절과 의리를 앞세워 길러주신 공로를 이를 통해 살펴볼 수가 있다.”(영인본 염재야록 113쪽)
 

 
염재 조희제 선생(독립기념관 소장)
 의병활동과 항일운동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호남, 그 중에서도 중심지의 한 곳인 임실에 살았던 조희제는 호남지역의 애국지사와 우국지사의 행적을 자세히 기록하여 남기고자 했다. 특히 조희제는 항일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송병선과 기우만의 제자로서 간재 전우의 문인 등을 위주로 항일인사들의 행적을 수록했다. 이들 인물들의 행적을 크게 나누어보면 ▲의병을 일으켜 적극 항쟁한 유형, ▲울분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유형, 그리고 ▲은사금 거부· 호적입적 거부·납세 거부 등 일제 식민지통치에 나름대로 저항하면서 세상을 떠나 은둔한 유형 등이 있다.

 조희제는 이처럼 염재야록을 편찬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거나 국권을 상실한 뒤에도 일제의 식민 지배를 거부하며 끝까지 지조를 지켰던 이들을 역사에 길이 남기려 했던 것이다. 
 

 #. 애국지사 조희제와 ‘염재야록’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항일운동과 애국지사들의 행적 등을 기록한 책으로 ‘염재야록’이 있다. 염재야록은 전북 임실의 유학자인 염재(念齋) 조희제(趙熙濟)가 을미사변과 한일합방 전후, 그리고 일제강점기 치하에서 항일운동을 펼치거나 절개를 지키다 순절한 이들의 행적을 정리한 책이다. 뿐만 아니라 을미사변, 을사늑약, 한일합방 등의 전말과 각종 상소문과 격문·통문 등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애국지사 조희제’와 ‘염재야록’이란 책은 조희제가 2016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돼 뒤늦게야 세상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염재야록(念齋野錄). 전북 임실의 유학자 조희제가 을미사변 이후, 한일강제병합(경술국치) 전후 그리고 일제 강점기 항일 운동을 펼치거나 절개를 지키다 순절한 이들의 행적을 수록한 책이다. 해방 후 선생의 제자 조현수가 마루 밑에 있던 덕촌수록 초고본을 꺼내 염재야록으로 간행했다.(독립기념관 소장)

 #. 염재 조희제의 가계와 생애

 조희제는 본관이 ‘함안’이며, 자는 운경(雲卿)이고, 호는 염재(念齋)다. 1873년(고종 10) 12월 10일 임실군 덕치면 회문리 절골(寺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참봉 조병용(趙柄鏞)이며, 어머니는 안동 김 씨인 김헌기(金憲基)의 딸이다. 조병용과 안동 김씨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그 중 둘째 아들이 조희제다.
 

조희제 생가터(조희제 일가인 조종래(82) 씨가 생가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집안 대대로 유학에 종사하며 학문을 닦고 나라에 충성을 다한 가문의 전통은 조희제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특히 항일의식이 투철했던 부친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조희제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염재야록’ 편찬이다. 평생 염재야록의 편찬을 위해 모든 정력을 쏟아 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38년 11월 조희제가 염재야록을 편찬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편찬을 주도했던 조희제는 물론 최병심·이병은·김영한도 임실경찰서(지금의 임실문화원 자리)로 연행됐다. 이들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난을 겪었다. 특히 조희제는 혹독한 고문을 당해 거의 목숨이 끊어질 정도였다. 집으로 돌아와 몸조리하고 있는데 상투를 자르라고 다그치자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그의 나이 60세 되던 해였다.

 
 #. 항일활동 역사서 염재야록의 편찬
 
 산간지대에 자리한 임실은 구한말 의병활동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지역이다. 을사조약 이후 최익현과 임병찬 등은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순창 등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907년 이후에는 이석용과 전기홍 등 임실 출신 의병장들이 장성의 기삼연과 연합하며 임실을 무대로 적극적인 의병활동을 펼쳤다.

 일제에 대한 의병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된 지역의 한 가운데 조희제는 평생을 보냈다. 이러한 지역적 조건이 조희제에게 의병의 역사와 일제에 맞선 인사들의 행적을 기록하기 위한 동기를 부여했다. 스승 송병선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자살을 했다. 기우만은 을미사변 이후 의병활동을 펼치다가 옥고를 치렀다.

 염재야록을 집필하기로 마음먹은 조희제는 수십 년에 걸쳐 각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항일투쟁 사실을 모았다. 또한 법정에서 애국지사들이 재판을 받는 과정을 방청하며 기록하기도 했다. 염재야록 편찬은 조희제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 과정에는 여러 사람이 참여해 마침내 1931년 건(乾)·곤(坤) 두 책으로 이루어진 염재야록 초고가 완성됐다.
 

 #. 염재야록 마루 밑 땅속에 숨겨

 조희제는 1931년에 초고를 완성한 다음 1934년에 각각 최병심과 이병은에게 서문과 발문을 부탁하고, 서울에 사는 김영한에게 교정을 의뢰해 염재야록 편찬 작업을 마무리했다. 조희제와 이병은·최병심은 간재 전우의 문인으로서 평소에도 서로 교류하고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최병심과 이병은은 위험을 감수하고 서문과 발문을 쓰게 되었다.
 

덕촌수록(悳村隨錄). 덕촌수록(悳村隨錄)은 염재 조희제 선생이 1895년 을미사변 이후부터 1918년까지 의병장, 애국지사들의 절의실적(節義實蹟)을 모아 전기체로 서술한 6권 2책이다. 염재는 염재야록 원고를 완성하고 일제 경찰의 관심을 피하기 위하여 책의 표지에는 덕촌수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덕촌’은 염재가 살던 ‘덕치(德峙)’를 가리킨다.

 그러나 1938년 겨울 염재야록 편찬 사실이 발각되어, 조희제를 비롯한 최병심·이병은·김영한은 임실경찰서에 연행돼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조희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대책을 세웠다. 염재야록 원고를 ‘권6’으로 완성해 건(乾)·곤(坤) 두 책으로 편집한 후 책의 표지에는 ‘덕촌수록(悳村隨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덕촌’은 조희제가 살던 ‘덕치(德峙)’를 가리키는는 말로 ‘덕치(덕촌)의 이야기를 기록한다’는 뜻으로 남의 이목을 피하려 했다. 그리고 1질은 책상 위에 두고, 1질은 궤짝에 넣어 마루 밑 땅을 파서 묻어두었다.

 조희제의 손자뻘이며 제자인 조현수는 조희제의 이웃에 살며, 염재야록 편찬 작업을 도왔다. 조희제와 함께 임실경찰서에 연행돼 조희제가 고문을 당하고 풀려나 자결하자 초상과 장례를 도맡아 치렀다. 해방 이후 마루 밑에 있던 덕촌수록 초고본을 꺼내, 이를 바탕으로 다시 편집해 염재야록이라는 표지를 붙여 건·곤 두 책으로 간행했다.
 

조희제 묘소(조희제 일가인 조종래(82) 씨가 생가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염재야록의 체제와 내용

 염재야록은 권6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머리에 최병심과 조희제의 ‘서문’, 그리고 끝부분에 이병은의 ‘발문’이 실려 있다. ‘권1’은 을미사변과 1895·1896년의 의병활동, ‘권2’는 을사늑약의 전말과 을사늑약에 반대해 자결한 이들의 행적, ‘권3’은 1906·1907년의 의병활동, ‘권4’는 한일합방의 전말과 합방 후에 일제에 맞서 절개를 지킨 분들의 행적, ‘권5’와 ‘권6’은 절의문(節義文)이 실려 있다. 그리고 책 끝에 ‘구한말 절개를 지킨 여러분의 행적 가운데 수록하지 못한 이들의 표(韓末節義諸公事行未者表)’, ‘절개와 의리를 지킨 이들이 지은 글 가운데 아직 수록하지 못한 글의 표(節義人所製文字未者表)’가 실려 있다.

 전자의 경우는 을미년, 을사년, 병오·정미년, 경술년으로 구분하고 거주지역과 명단을 기록했다. 후자의 경우는 그 목록만 기재하고 있다. 염재야록의 수록 인물에 대한 특징은 대부분 전우, 기우만, 송병선의 문인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여타 지역에 비해서 호남지역의 인사를 많이 수록하고 있다.
 

본경찰에 붙잡혀 고문을 당했던 임실경찰서 자리.(현재는 임실문화원)

 “훌륭하구나! 염재가 야록을 만든 일이여! 한편으로는 천고의 충성스런 넋을 달래고, 한편으로는 여러 역적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뒷날 나라를 다스릴 사람으로 하여금 의리를 바르게 하고, 잇속을 챙기지 않으며 어진 이를 등용하고 못난 자를 물리쳐 잘못된 전철을 다시 밟지 않도록 하고자 함이구나. 염재가 세상에 남긴 교훈을 작은 도움뿐이라 하겠는가?”

 기획취재팀
 특별자문 : 변주승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취재팀> ▲한성천 부국장(팀장) ▲신상기 사진부장 ▲이정민 기자 ▲김기주 기자
 <자문기관> ▲광복회 전북지부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K-history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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