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만양병, 무엇이 문제였을까
십만양병, 무엇이 문제였을까
  • 장상록
  • 승인 2017.06.26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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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2년, 그 해 일본이 조선을 침공했다. 규모는 정규군 20만 이상이었다. 조총으로 무장하고 완벽하게 훈련된 당시 일본군의 전투력이라면 유럽의 그 어떤 나라도 대적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얘기하는 학자도 있다. 그런데 전투력 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일본의 경제력이다. 그 정도의 상비군을 유지하고 전선(戰船)을 건조해 바다를 건너 원정에 나선다는 것은 막대한 경제력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당시 조선은 어떠한 대비를 하고 있었을까.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조선 역시 일본의 심상찮은 움직임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1583년, 당시 병조판서였던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상소문을 통해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오래도록 승평(昇平)을 누려 태만함이 날로 더해 안팎이 텅 비고 군대와 식량이 모두 부족하여 하찮은 오랑캐가 변경만 침범하여도 온 나라가 이렇게 놀라 술렁이니, 혹시 큰 적이 침범해 오기라도 한다면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도 어떻게 계책을 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옛말에, 먼저 적이 나를 이기지 못하도록 대비한 다음에 적을 이길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라고 하였는데, 지금 우리나라는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어 적이 오면 반드시 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당시 국방부장관에 해당하는 지위에 있던 율곡의 이러한 인식은 자연스럽게 그가 얘기했다는 십만양병(十萬養兵)과 연결된다. 그럼 무엇이 문제였을까. 이제 당시 국왕 선조(宣祖)의 인식을 살펴보자. 선조 21년(1588년) 3월 26일 실록 기사다.

 이때 상이 남방(南方)에 왜변(倭變)이 발생할 것을 염려하여 비변사로 하여금 죄폐(罪廢) 중에 있는 쓸 만한 무사(武士)를 초계(抄啓) 서용하게 하였는데, 군율(軍律)·장람(贓濫)을 범하였거나 기망(欺罔)한 죄를 범하였던 자가 서용되었고, 성적이 하등에 있던 자도 여기에 참여되었다.”

  후일 파격적인 이순신의 발탁과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왕 선조 역시 충분히 위기를 감지 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십만양병은 일장춘몽으로 끝나버린 것인가.

  거기엔 분명히 들어나는 몇 가지 한계상황이 있었다. 먼저, 조선이 가진 경제력의 한계다.

  상비군 10만 명을 훈련시키고 유지한다는 것은 국가재정에 엄청난 부담이 된다. 당시 조선엔 그런 물적 토대가 없었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당시 조선인의 의식체계가 위기를 인지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보다 적확(的確)하게 표현한다면 그것은 전쟁위험에 대한 의도적인 외면이었다.

  전쟁발발 불과 수개월 전 상황을 기록한 1591년 11월 1일 수정실록기사에 그 장면이 잘 나와 있다.

  “당시에 왜란을 대비해서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병정(兵丁)을 선발하자 영남의 사민(士民)들은 원망이 더욱 심하였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불편하지만 이 기사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 하나가 있다. 역사는 경중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종국적으로는 그 구성원 모두에게 인과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다.

  율곡도 인정했듯이 조선은 고구려는 물론 고려와도 너무 달랐다. 그들은 더 이상 살수대첩과 안시성 전투로 기억되는 나라도 아니었고 귀주대첩의 주인공도 아니었다. 그들은 대내적인 체제의 안정도에서는 그 어떤 도전도 분쇄해버리는 극강의 존재감을 보여준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너무도 허약한 이중적 모습을 가진 존재였다. 그것은 조선이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이제 대한민국은 조선과 어떻게 다른가. 조선이 고려와 다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가 분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조선은 그 다른 어떤 대상도 아닌 우리 선조의 나라이고 우리 존재의 근거다. 조선 개국 후 200년간의 평화, 그리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참화속에서도 명맥을 유지한 조선이 가진 평온함의 시간이 약 200여년이다. 그리고 그 평화의 종국은 언제나 파멸적이었다. 평화는 우리에게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지금 관리하지 못한 평화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오겠지만 고통은 후손들에게 돌아간다.

 장상록<예산군농업기술센터 농촌지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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