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만세운동 앞장 선 여인 최요한나(崔要漢奈)
전주만세운동 앞장 선 여인 최요한나(崔要漢奈)
  • 한성천 기자
  • 승인 2017.06.21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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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인 항일운동가 혼 되살린다> 1부-전북 항일운동가의 삶 ②
33인의 민족대표가 모였던 당시의 태화관 건물

 1919년 3월 1일 정오. 서울 종로의 파고다공원에는 수 천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때 공원 내 팔각정에는 비장한 얼굴로 한 청년이 서 있었다. 그는 서서히 모여드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각오를 한 듯 품에서 무언가를 꺼낸 후 읽기 시작하였다.

 “오등(吾等)은 자(慈)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

 역사적인 ‘독립선언서’가 낭독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독립선언서는 먼저 안병희를 대표로 하는 민족대표 33인이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서명하였다.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서명한 33인의 역사화
   원래는 독립선언서를 민족대표들이 군중들이 많이 모이는 파고다공원에서 낭독하기로 하였으나 폭력사태가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태화관에서 이를 낭독하고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는 경찰에 연행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파고다공원에서는 대기하고 있던 경신(儆新) 출신 정재용이 대신해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던 것이다.
 

 #. 독립만세운동 전국으로 확산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만세를 외쳤다. 이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서울 시내를 행진했다. 이렇게 촉발된 독립만세운동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서울의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된 연유를 살펴보면 이날 파고다공원에 수 천명의 사람들이 운집한 것에도 기인(起因)하였다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의문의 고종 붕어(崩御)로 인해 3월 3일에 예정된 고종의 인산(因山)날에 참석하고자 각지에서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이 때맞춰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 낭독을 듣게된 것이다. 이후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만세 분위기를 전한 것에 영향을 받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근원적인 것은 1910년 강제 한일합방 이후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은 민족 말살을 꾀하려고 반인륜적 강압 통치와 경제적 수탈을 일삼았다. 한국의 상황을 극도로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이를 보다 못해 저항하던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잔인한 일제에 의해 갖은 고문에 시달렸다. 후일 유관순도 10대의 어린 나이로 희생되기에 이르렀다.

 #. 전북도 만세운동 들불처럼 번져

 일제 총독부의 무단통치에 대한 우리 민족의 울분이 꿈틀대고 있던 차에 서울 파고다공원의 만세 사건은 불쏘시개 역할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봇물 터지듯 전국에서 만세의 횃불이 타올랐다. 독립만세운동은 어느 한 단체의 운동이 아니었다. 전 민족의 운동이었다. 전북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북에서는 처음으로 수탈의 현장이었던 군산에서 시작되어 익산, 임실 등지로 번졌다. 전주는 3월 13일에 남문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전주 서문교회
   전주만세운동은 함태영(3대 부통령, 1952~1956)에게서 전달 받은 독립선언서를 임영신(초대 상공부장관, 1948~1949)이 소지하고 전주로 내려와 서문밖교회(이후 서문교회) 이돈수 장로에게 전달됐다. 이돈수 장로는 이를 서문교회 김인전 목사에게 전달해 만세운동 거사가 계획되었다. 또한, 대외 교섭을 맡은 임영신은 신흥학교 학생들과 행동을 같이하기로 결정을 이끌어 냈다.

 한편, 거사 몇 일 전 마로덕 선교사가 서문교회에서 개최하는 성경학교에 참석한 각 지방 교인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장날에 만세운동을 하도록 했다. 당시 서문교회에 참석한 각 지방의 장로 집사들 300여 명은 만세운동 자료들을 가지고 흩어졌다. 한 사람도 일제에 발각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들의 열의와 각오가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 전주장날에 맞춘 전주만세운동 거사

 드디어 만세운동 D-day의 날이 밝았다. 만세운동은 전주 장날인 3월 13일 정오를 기해 거사하기로 되어 있었다. 모두가 숨죽이며 그 시간을 기다렸다. 이 시점부터 최요한나(崔要漢奈)가 등장한다. 최요한나가 거사를 바로 앞두고 남문에서 울리는 정오의 종소리를 기다리며 숨어 있던 곳이 바로 아버지 최국현(당시 남문교회 장로)이 운영하는 기름집(현재 남문시장상인회 건물 위치로 추정) 이었다.

 최요한나는 1900년 8월 3일 정읍군 고부면 대정리에서 출생했다. 전주로의 이주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하지만 ‘서문교회 100년사’에 그녀의 아버지 최국현이 1908년 4월 27일 ‘교회 회계 집사’로 선임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1908년 이전 아버지를 따라 정읍에서 전주로 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최국현은 집사에 이어 장로로 피택되어 시무하던 중 서문교회가 개척한 ‘남문교회’(강암서예관 옆)에 책임자로 임명받았다. 그는 줄곧 ‘전동 295번지’에서 기름집을 운영하면서 남문교회를 세워나갔다. 그러던 중 최 장로는 그의 딸 최요한나가 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하게 되자 당일 자신의 집에서 대기하며 거사를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전주만세운동은 기독교, 천도교, 신간회 등 세 기관에 의해 준비됐다. 기독교 측에서는 신흥학교와 기전학교가 주축이 되었다. 서울에서도 그랬듯이 전주에서도 신흥, 기전 등 기독학교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선두에 나섰다. 학생들의 만세운동 참여는 일시적인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국권상실 이후 항일정신이 투철한 교사들에 의해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교육의 영향이었다.
 

   #. 전주남문시장 그날의 함성 간직

 1919년 3월 13일, 정오를 알리는 인경이 울리자 학생들은 함성을 지르며 남문시장으로 달려나갔다. 그날이 장날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시장으로 모여들었다. 기전여학교 학생들과 신흥학교, 전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인파 사이를 다니며 태극기와 유인물을 나누어 주었다. 군중들은 이에 합세하여 남문에서 우편국 앞까지 시위행진을 하였다.

 최요한나가 전주만세운동 최일선에 섰다. 그녀가 적극적인 행동을 보인 것은 아버지 최국현 장로로부터 기독교신앙을 물려받았고, 또한 기전학교에서 민족정신 교육을 통해 뚜렷한 민족의식이 마음에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 한 최요한나는 이 사건으로 인해 임영신 등 13명의 기전학교 학생들과 함께 경찰에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최요한나는 만세사건 이후 기전학교를 졸업(7회)했다. 그리고 1923년 한예정성경학교(현 한일장신대학교)에 교사로 부임했다. 당시 이 학교는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운영하고 있었다. 교사 최요한나는 한국인 최초의 교사 2명 중 한 명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실력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녀가 학교에 언제까지 근무했고, 무슨 과목을 가르쳤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아쉬웠다.

 최요한나는 한예정성경학교 근무 시절에 김인섭과 결혼해 슬하에 3남 6녀를 두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시 남편을 먼저 보내고 부산에서 피난 시절을 보내다 1956년 세상을 떠났다. 후손들은 어머니 최요한나의 정신을 이어 사회 각 분야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헌신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풍남문에서 본 최요안나씨 생가터
 #. 일제 괴롭힘 속 56세 일기 마쳐

 최요한나는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이후 개인적으로도 고초를 당했지만,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던 장소(최국현 장로의 집), 그리고 협력했던 가족들을 문제 삼아 가족 전체가 큰 어려움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요한나는 혼란의 시기에 갑작스러운 남편과의 사별 이후 부산 피난 등 어려운 시간을 보냈으나 전혀 엄격하지 않았고 자녀들에게 온아한 어머니로 남아 있다.

 현재 생존하고 있는 자녀의 기억을 들어 보면 최요한나는 부산 피난시절 범일동의 한 탁아소에서 근무할 때 매일 한쪽 골방에서 기도했다고 한다. 어렵게 살림을 꾸려 나가는 상황에서도 성미(매일 한 수저씩 항아리에 떠 넣는 쌀)를 모아 교회에 헌물했다.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인정 베푸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은 것이다.

 최요한나는 56세라는 비교적 짧은 생애를 민족의 불운한 시기에 살다 갔다. 전주에서의 생활 이후로 부산에서 힘든 삶을 살았지만, 그녀의 나라를 위한 독립만세운동의 족적은 크게 남아 있다. 따라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정신이 잊혀지거나 희미해져서도 안 된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더욱 선명하게 기억해야 한다. 늦게나마 정부에서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기획취재팀> 특별자문 : 김천식 한국고전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기획취재팀> 한성천 부국장(팀장)·신상기 사진부장·설정욱·이정민 기자
 <자문기관> ▲광복회 전북지부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K-history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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