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과 의리의 지성인, 습재 최제학 의사
신념과 의리의 지성인, 습재 최제학 의사
  • 한성천 기자
  • 승인 2017.06.14 17: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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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인 항일운동가 혼 되살린다 <1부> 전북 항일운동가의 삶 ①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특히, 전북산천 곳곳에는 일제에 항거해 거병한 의병들의 파란만장한 삶이 배어 있다. 그리하여 6월1일은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의병의 날’이다. 또 1906년 6월 4일은 정읍 무성서원에서 호남지방 첫 의병이 봉기 된 날이다. 정읍에서 봉기해 순창까지 확산된 의병전투와 일제에 항거한 전북출신 항일의사(抗日義士)들이 많지만 그간 학술적·역사적으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그들의 삶을 오늘날 되새겨 전북 항일의사들의 구국혼(救國魂)을 되살리려 한다. 

 이에 전북도민일보는 전북 항일운동가들의 삶과 발자취를 정리하는 ‘2부작-전북인 항일운동가 혼 되살린다’를 준비, 기획취재팀(한성천 부국장(팀장), 신상기 사진부장, 설정욱·이정민 기자)을 꾸렸다. 또, 역사적·사실적 근거를 뒷받침하기 위해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해온 광복회 전북지부·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K-history사업단과 연구자들로부터 자문을 받아 ‘1부-전북 항일운동가의 삶’, ‘2부-전북 항일운동가의 발자취 따라가다’ 등으로 구성해 전북 애국의사들의 삶을 2017년 되살려 나갈 계획이다. 
 

 ■ 1부-전북 항일운동가의 삶 ① 신념과 의리의 지성인, 습재 최제학 의사

▲ 최제학 의사 생가터에서 설명하고 있는 최성은 씨
 항일의사 최제학은 누구인가?

 전북 항일운동가 최제학의 파란만장한 구국인생은 ‘면암(최익현)이 없으면 습재(최제학)도 없거니와 습재가 없으면 면암도 없다’는 말로 함축된다. 의병장 면암 최익현이 나오는 데 있어 최제학은 제자이자 가장 중요한 조력자였기 때문이다.

 최제학의 본관은 탐진 최 씨요, 자는 중열(仲悅), 호는 습재(習齋)다. 그는 1882년(고종 19년) 3월 17일 전북 진안군 목동(睦洞, 현재 성수면 도통리)에서 태어났다. 13살 소년이 됐을 때 동학농민군의 여파는 진안까지 미쳤다. 김개남 소속의 동학농민군 기마부대에서 활약하던 아버지 최성호(崔成鎬)는 그만 중상을 당한 후 힘들게 살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0살 청년이 된 최제학은 면암 최익현에게 스승의 예를 올리고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반대투쟁을 하던 최익현은 호남으로 내려와 의병을 조직하려 했다. 이때 최제학은 편지 전달과 거처 확보 등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오늘날 ‘수행비서’ 역할이었던 셈이다. 스승 최익현의 신변보호를 위해 최 씨 제각이 있었던 진안 삼우당(三友堂. 현재 최제학 의사 기념비가 세월져 있음)에 모시면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밤중에 음식을 날랐다. 가산을 모두 탕진할 정도로 온 힘을 다 쏟았다.

▲ 최익현 의병장을 은닉시켰던 삼우당에서 내려다 본 삼우당터(기념비 자리)와 최제학 생가터. 앞에는 섬진강 상류와 멀리 봉황산과 만덕산이 목동마을을 감싸고 있다.
 최제학이 낳고 자란 진안 목동마을. 뒤로는 매봉재가 마을을 감싸고 앞으로는 섬진강 물줄기가 논밭에 생명수를 공급하고, 멀리선 봉황산과 알미산, 만덕산이 목동마을 휘감고 있다. 그래서 이곳에 ‘삼우당’ 표지석 뒷면에 ‘우당팔경(右堂八景)’이라 새겨져 있을 정도로 풍광이 빼어났던 곳임을 전했다. 그러나 135년이 지난 지금의 최제학 생가터는 손자벌되는 최성근(80) 씨가 농사를 지으며 지키고 있다. 

 최 씨는 구전으로 전해온 최제학 할아버지에 대해 “최제학 할아버지와 집안 어르신들이 항일운동을 하다 보니 항상 일제로부터 감시당하고 수시로 잡혀 가 고초를 겪어 대부분 이곳을 떠났다”며 “나라를 되찾는 일에 앞장서다 정말 어렵게 생활하셨던 어르신인데 생가터며, 최익현 의병장을 은닉시켰던 삼우당이며 제대로 보존되지 않고 있어 후손의 한 사람으로서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구국의사로 변신한 청년 최제학

 최익현은 의병 조직을 추진했다. 하지만, 인력과 자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를 본 최제학은 자신을 중국 상해에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당시 상해에 망명 중이던 민영익(閔泳翊)을 통해 자금을 확보하고 중국의 원세개(袁世凱)에게 부탁해 200~300명의 청나라 병사를 고용해 일제와 맞서기 위해서였다. 당시 청년 최제학의 결연한 의지는 스승 최익현에게 보낸 편지에 잘 담겨져 있다.

 ‘구차히 목숨을 구걸하며 왜놈들에게 부림을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넘실대는 바닷물에 제 몸을 던져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하지만, 최익현은 반대했다. 대신 호남의병을 준비하는 데 힘쓸 것을 주문했다. 1905년 12월 14일. 최제학은 ‘노성 궐리사에 모여 의거를 도모하자’는 내용의 최익현 편지를 품고 유학자 송사 기우만을 찾았다. 하지만, 기우만은 불참 의사를 밝혔다. 이때 기우만 옆에서 대화를 듣던 제자 정시해가 취지에 동의해 함께 길을 나섰다. 이것이 최제학과 정시해의 첫 만남이었다. 

 궐리사 모임 이후 최제학은 정시해와 호남 곳곳을 돌아다니며 군자금을 모았다. 이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일본경찰에 붙잡혀 갖은 수모를 당하기도 수 차례. 훗날 10일간의 호남의병을 마치고 순창에서 의병이 해산했다. 최제학은 일본군사령부에 잡혀 감옥에 갇혔다. 이때 가장 가까운 동지였던 정시해가 일본진위대의 탄환에 절명했다는 비보를 들은 최제학은 애절하게 추모했다. 최제학은 출감 후에도 정시해 후손들과 가족같은 관계를 이어갔다.

▲ 최성은 씨가 생가터에서 새롭게 발견해낸 기념비. 내용은 탁본해야 확인할 수 있다.
 ‘순창 12의사’ 혹독한 고문당해

 정읍 태인에서 시작해 순창에서 끝난 10여 일간의 호남항쟁에는 1000여 명까지 참여했다. 을사늑약 당시 항일의식의 단면을 보여준 대목이다. 최익현과 끝까지 해산하지 않았던 ‘순창 12의사(義士)’는 1906년 4월 23일 포승줄에 묶인 채 죄인으로 잡혀 27일 서울 일본군사령부로 끌려갔다. 최제학을 비롯한 12의사는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최익현과 임병찬은 징역형을 선고받아 7월 8일 대마도 이즈하라(嚴原)에 소재한 일본군 위수영(衛戍營)으로 압송됐다. 최제학은 순창 12의사 중 무거운 형기인 4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최제학의 몸에 남겨진 고문 자국을 본 조카아들 최병섭은 “척추 아래 뼈 두 마디가 어린애 주먹만큼 뒤틀려 있고 허벅지 살이 모두 상처투성이로 살갗이라곤 없을 정도였다”고 증언했다. 

 만기 출소한 최제학은 곧장 11월 4일 배를 타고 출발해 5일 대마도에 도착해 최익현을 만났다. 하지만 이미 위독한 상태였다. 그리고 17일 스승 최익현은 이국 외딴 섬에서 서거했다. 최제학은 12월 7일 스승의 시신을 정산(定山) 본가로 운구했다. 운구 행렬 도중 신분계층 상관없이 수 많은 인파들이 애도하고 망국의 설움에 토로했다. 최제학은 당시 정황을 ‘마관반구일기(馬關返柩日記)’에 상세하게 기록했다. 

 일제 요시찰 대상 최제학

 1907년 8월 14일 최제학에게 경성 사직동에 사는 정윤(鄭潤)이라는 젊은이가 찾아왔다. 그는 완주 고산(高山)에 사는 윤자신(尹滋臣)을 소개하면서 함께 의병을 도모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윤자신은 목포의 대상(大商) 김성규(金聖奎)가 소유한 고산 일대 전토 지세(地稅)를 관리해 자금력이 있었다. 그리하여 항일운동 결의를 맺은 최제학과 윤자신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가며 구체적 계획을 세우며 때를 기다렸다. 그런데 윤자신이 거사 직전 ‘의병’이라고 자칭하는 수십 명의 동학 무리들에게 집이 약탈당하고 중상을 입어 강경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발생했다.

 일제의 탄압과 감시를 받아온 최제학은 부득불 지리산으로 피신했다.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지리산에서 암중모색했다. 그러나 1912년 중국 상해로 가는 배편을 알아보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구금, 고문을 당하다 20일만에 풀려났다. 그리고 계속 미행 감시를 당하는 특별관리 대상이 됐다. 1929년에는 광주학생의거에 협력하러 갔다가 붙잡혀 또 50일간 구금됐다. 1939년 4월에는 경북 상주에서 체포되어 구금되는 등 최제학은 이른바 요시찰 대상이었다. 

▲ 경남 청학동에 있는 최제학 의사의 묘소
 78세 일기로 파란만장한 구국운동 마감

 젊음을 온전히 바쳐 구국운동을 펴오던 최제학은 1945년 해방을 맞았다. 기쁜 마음도 잠시. 남북 분단과 좌우 분열에 염증을 느낀 최제학은 현실정치에서 발을 빼 평민으로 돌아갔다. 2년 후 1947년 호산(湖山) 안종삼(安鍾三)의 주선으로 구례로 거처를 옮겼다. 여순사건, 6.25사변으로 1953년 하동 청암면으로 다시 옮겼다. 최제학은 이곳에서 한약방 등으로 어려운 생계를 이어갔다. 자신이 죽을 고비를 수 없이 넘긴 파란만장했던 항일운동가였다는 사실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최제학이 가난한 한약방 주인으로만 여겼다.

 격변기에 불꽃처럼 살았던 최제학. 그는 1959년 9월 10일 청암면 절동(寺洞)에서 78세의 파란만장했던 일기를 끝으로 숨을 거두었다. 최제학은 현재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에 잠들어 있다.

 기획취재팀

 특별자문 : 김건우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취재팀> 한성천 부국장(팀장)·신상기 사진부장·설정욱·이정민 기자
 <자문기관> 광복회 전북지부·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K-history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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