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대통령이 밝힐 세 빛
새 대통령이 밝힐 세 빛
  • 이동희
  • 승인 2017.05.15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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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9대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취임선서 행사를 치룬지 이제 며칠에 불과하지만 벌써 여기저기에서 국민들의 환호와 호평이 넘쳐난다. 인사 스타일, 적폐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그에 대한 처방, 서민 행보, 시민들을 대하는 친근함, 낮은 자세로 일관하는 일상, 여기에다가 ‘유쾌한 정숙씨’로 명명된 영부인의 인기까지 더해져 웬만한 스타를 능가하는 인기몰이 중이다. 하긴 취임 100일을 허니문 기간이라 하여 새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나 견제보다는 연착륙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면 취임 초기의 인기는 당연하리라.

 이번 선거 결과 문재인 대통령은 전라북도에서 64.8%라는 전국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것은 전북 도민들이 부침하는 역사의 격류 속에서도 얼마나 탁월한 정치 감각을 지니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 쾌거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아울러 중앙 정치권력에서 소외된 지역 정서가 새 시대를 열망하는 투표 행위로 드러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북 도민들이 당대의 역사의식에 얼마나 투철했는가는 빛의 의미를 새겨볼수록 뚜렷하다.

 탈무드에 “한 개의 촛불로 많은 촛불에 불을 붙여도, 처음의 촛불의 빛은 약해지지 않는다.”는 잠언이 전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탄생은 촛불에서 촉발된 국민적 빛의 에너지가 승화된 결과적 산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새 대통령은 적어도 집권 기간에 이 빛의 에너지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역량을 모아야 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유념해야 할 빛의 에너지는 적어도 세 가지에서 발원한다.

 첫 번째 빛은 앞에서 언급한 촛불이 밝힌 빛이다. 그 길고 추운 겨울 전국 방방곡곡에서 밝혀 든 촛불은 시대와 역사를 밝힌 빛이었다. 어느 친박 인사는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며 촛불이 밝힌 빛의 힘을 무시하려 했지만, 국민이 밝혀 든 촛불은 온갖 바람에도 꺼지기는커녕 오히려 활활 타올랐다. 그래서 내가 밝힌 촛불이 이웃으로, 이웃에서 공동체로 번져, 지역과 세대와 계층을 초월하여 거대한 빛의 물결과 빛의 광장을 이뤘다. 한 개의 촛불이 많은 촛불에 옮겨갔어도, 처음의 촛불은 약해지지도 꺼지지도 않았다.

 두 번째 빛은 햇볕정책에서 유발된 빛이다. 대선 토론 과정에서 여타의 후보들이 문재인 후보에게 촛불정책의 계승 여부를 질문할 때, 확고한 신념을 드러내는 데 있어 주저하는 것을 지켜보며 매우 걱정스러웠다. 대북 정책에서 햇볕정책이 아니면, 전쟁이라도 불사하겠다는 것인지? 하긴 ‘한반도 화약고설’을 부풀리며 국민들의 안보 불안 심리를 자극했던 대선과정을 보면 햇볕정책의 빛은 더욱 환하게 밝혀야 한다.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의 먹구름을 드리우지 않으려면 새 대통령은 햇볕의 빛을 더욱 따뜻하고 밝게 밝혀 들어야 할 것이다.

 세 번째 빛은 달빛의 빛이다. 외신은 문재인 신임 대통령이 ‘달빛정책’(Moonshine policy)을 펼칠 것이라며,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추진한 대북 ‘햇볕정책’(sunshine policy)을 계승할 것이라는 분석을 문 대통령의 영문 표기를 조합해서 관망하고 있다. 물론 그런 의미의 달빛 정책도 필요하다. 그렇지만 필자는 다른 의미의 달빛이 필요하다고 본다. 달빛은 촛불이나 햇볕에 비해 ‘밝기’는 하지만 ‘열기’는 없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은 달빛과 같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빛으로 상처 입은 국민들의 마음을 감싸주고 비춰주는데 소홀함이 없기를 바란다. 보수정권 9년은 그전 민주정부 10년이 쌓은 치적을 역주행하며 지워버린 것은 물론 그야말로 국민들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헬조선, 자살공화국, 5포시대, 비정규직, 세월호, 저출산, 국정 역사교과서…등등 말만 들어도 섬뜩한 비인간-비정상적 일상들이었다. 문 대통령은 상처 입은 국민들의 마음을 달빛처럼 감싸 안아 줄 것을 기대한다.

 빛은 새벽을 연다. 새벽이 열려야 새날이 온다. 새날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다. 빛은 새 역사를 만드는 원동력이다. 연만한 시대를 견뎌온 시인은 이렇게 새날을 기대하며 ‘새벽’을 노래한다. “강의 침묵이 무거워 안개는 조심스럽게 걷는다/ 어쩌다 수면 위로 솟는 물고기는 오늘 아침 강물의 심지를 읽지 못했다/ 지금쯤 지느러미를 정지하고 침묵을 깨는/ 무슨 소리든 찾고 있을 것이다// 아침 뻐꾸기 소리나 휘파람새 소리는 강물 속에 닿지 못한다.// 강은/ 침묵이 침묵을 깰 때를/ 기다린다”(송명숙「새벽」전문)

 역사[강]는 빛[침묵]이 어둠[침묵]을 깰 때를 기다려 새날[새벽]을 연다.

 이동희<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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