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책임과 실천: 의문다질(醫門多疾)
정치의 책임과 실천: 의문다질(醫門多疾)
  • 정항석
  • 승인 2017.05.10 14: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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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자들이 있는 곳에 의원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으레 곪으면 약을 바르거나 째서 환부를 도려내고 시술해야 한다. 그래야 아픈 부위가 더 이상 덧나지 않게 된다. 다만, 의료기술을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잘 아는 전문가가 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곪은 것을 결코 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포함하며 진단과 치료를 잘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정치사회는 ‘안녕(well-being)한가?’ 정말 그런가? 이에 대한 의문에 대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는 ‘예(yes)’의 대답을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어느 날이었다.

중니(仲尼)의 제자 안회(顔回)가 위나라로 가야겠다고 공자에게 말했다. 그러자 중니가 물었다.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위나라로 가려고 합니다.” 안회가 대답했다.

공자가 물었다. “거기 가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그러자 안회가 다음과 같이 그 까닭을 말했다.

“듣건대 위나라 임금이 어려서인지 멋대로 독단(獨斷)하여 말이 아니라고 합니다.”

“불견기과(不見其過), 그가 자기의 허물과 오류를 깨닫지 못하고 나라를 가벼이 여겨 백성들을 함부로 부림으로써 백성들이 혹정(酷政)에 시달리고 있다 합니다.”

중니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러자 안회가 자신의 말이 수용되는 것으로 알고 계속 말했다.

“위나라 백성들을 그 재난으로부터 구하려면 도움이 필요하지 않겠는지요!”

“예전에 스승님께서 제게 일러주시기를 나라가 제대로 되는 곳을 피하고 그렇지 못한 나라로 가서 도움을 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른바 ‘환자들을 위해 의원이 있어야 한다’는 의문다질(醫門多疾)이 아니겠는지요?”

<장자(張子) 四章 인간세(人間世)>에 나오는 이야기로 위 대화는 환자와 의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재난 혹은 위기에 처한 사회에서 이를 방지하고 대처할 수 있는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른다. 실제 모든 사회는 크건 작던 간에 모든 문제를 안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위기와 문제에 대한 대안적 정책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고려되어야 할 것이 있다. 우선, 문제의 크고 작음에 따라서 이를 처리하는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인적 그리고 물적 재원이 풍족하지 않은 탓이다. 또한, ‘누가 그리고 무엇으로 우선적 순위를 정할 것인가’ 그리고 이를 처리하는 데 ‘어떻게 할 것인가’가 하는 것도 관건이다. 그렇다면 물어보자. 우리사회에서 환자는 누구이고 환부의 크고 작음은 무엇인가? 주지하다시피 정치적인 측면에서 많은 국민들이 정치에 대한 멸시 그리고 환멸을 가지고 있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는 실정이다.

기실, 종합뉴스의 맨 처음에 등장하는 국내정치적 이슈에 대하여 긍정보다는 부정적 견해를 담은 절대 대다수의 국민들의 모습이 쉬이 발견된다. 그 만큼 불만이 있다는 것인 동시에 관심이 크다는 것을 반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국 70년 동안 이 문제는 반복적 악순환이 되어오고 있고 여전히 정치적 문제의 환부로 자리 잡고 있다.

왜 그럴까? 어느 사회이건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재원은 풍족하지 않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한국보다 물적?인적 재원이 많다고 말하기 어려운 서유럽 선진국들은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와 상황이 다르다. 물론 비교도 있을 수 있다. 어떠한 비교이건 간에 당연히 ‘왜 그럴까’ 하는 의문이 뒤따라야 한다. 그래야 환부를 고칠 수 있다. 어느 사회이건 대안적 정책은 늘 필요하다. 다만, 대안의 제시를 위하여 ‘누가 할 것이며 위기 진단에 관한 생산적인 관심을 모으는 것’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한국은 물적 재원이 풍족하지 않다. 그래서 인적 재원을 늘이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 이제는 ‘국민의 13% 정도가 대학의 물을 먹었다’는 속된 표현을 쓸 만큼 인적 자원은 많다. 또 다 아는 사실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에 대한 진전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한국의 국민이 결코 서구라파보다 지적 그리고 인성의 능력이 뒤처지지 않는다. 우리도 못할 까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현상이 반복되는 것은 ‘특정 메시아적 인물(?)’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아닌가가 반문한다.

다시 다 아는 것을 또 끄집어 내본다. 건국초기부터 대한민국은 정치적으로 파벌과 패거리 그리고 향우회적 성격의 정당이 있어왔다. 하지만 없는 것이 ?있다. 진성당원이다. 정치적 파벌과 패당적 그리고 향우회적 성격의 정당은 어느 나라에서든지 발견된다. 다만, 눈에 띄게 보이는 것은 진성당원과 가성(假性)당원의 구분이다. 서구 선진국들에서는 일반국민들이 특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에서 자신들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들고 정당을 구성하고 정당원이 되어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대표자를 선출한다. 이른바 진성당원이 되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반면 한국정치에서는 정당대표 혹은 일부 정당공천제에 의한 ‘공천’이 지속되고 있다. 편법적인 대표자 추천이 지속되는 한 정치에 대한 사회적 혐오현상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불 보듯 뻔하다’는 공천에 대한 부정, 의혹 등의 볼멘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규칙적인 당비를 지불하여 진성당원이 되어 특정 정치인들에 의한 공천제를 제거하는 것이 어떤가? 아마도 이 의문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기성 정치인들이 잘해야 뭐 내든가 말든가 하지!’ 맞는 말이나 귀납적으로 정치권에서 먼저 변하기 어렵다. 이제 큰 정치의 변화는 국민들의 변화 속에서 출발되어야 한다. 혹 국민들이 ‘주는 것보다 받는데 익숙해 버린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어제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한국정치의 곪은 환부를 지속시키는 주된 원인의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근원적으로 한국사회의 정치적 환부를 진단하고 위기에 대한 대안적 시각을 제시하는 사람은 특정의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제라도 진성당원을 위한 국민적 자각이 필요해 보인다.

정항석 (캠브리지대 연구학자, 전 대통령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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